좋아하는 문장들을 모아 #3
*순서에 의미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구절들을 기록해두기 위한 글입니다.
61.
미소는 전설 속 비밀의 열쇠처럼 엄마에게서 아빠에게로, 아빠에게서 내게로 부탁되었다. 죽는 순간 나는 미소에게 무슨 부탁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해. 사랑을 부탁할 것이다. 내 사랑을 부탁받은 미소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사랑을 품고 세상의 끝까지 돌진할 것이다.
-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中
62.
그때 죽음은 멀리 있었고 코앞의 현실은 가파르고도 권태로웠다. 부모님은 10년 넘게 대출금을 갚고 있었고 나는 나만의 대출을 책임져야 했고 미소는 친구도 없이 외로웠던 날들. 기쁘고 즐거운 순간에도 약간의 우울감은 살 냄새처럼 배어 지워지지 않았고, 나와 세상 사이에는 늘 안개가 끼어 있어 어떤 질문에도 흐리멍덩한 대답만 간신히 뱉어 내던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눈과 비를 막아 주는 천장과 차갑지 않은 바닥이 있었다.
-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中
63.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中
64.
여자는 계속 나를 붙들었다. 같이 가야 해. 죽지 말아야 해. 세상이 지옥이어서 우리가 아무리 선하려 해도,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악마야. 함께 있어야 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서로를 보고 만지고 노래하며 사람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해.
-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中
65.
언젠가 인류가 멸망하고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이 한줌 재로 돌아갈 그날에도 사람들은, 당신은, 우리는 사랑을 할 것이다. 아주 많은 이들이 남긴 사랑의 말은 고요해진 지구를 유령처럼 바람처럼 떠돌 것이다. 사랑은 남는다. 사라지고 사라져도 여기 있을 우주처럼.
- 최진영, <해가 지는 곳으로> 작가의 말 中
66.
그러면서 줄곧 바샤라트가 한 말이 얼마나 옳았는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더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과거로의 제 여행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제가 배운 것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 테드 창, <숨> 中
67.
설령 이런 사실을 자각한다 해도 슬퍼하지 말기를. 나는 당신의 탐험이 단지 저장고로 쓸 수 있는 다른 우주를 찾기 위함이 아니었기를 희망한다. 지식을 원했기를, 우주가 내쉬는 숨으로부터 무엇이 생겨나는지 알고 싶다는 갈망에 의해 움직였기를 희망한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다양한 양태까지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우주는 그저 나직한 쉿 소리를 흘리며 평형 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그것이 이토록 충만한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당신의 우주가 당신이라는 생명을 일으킨 것이 기적인 것처럼.
- 테드 창, <숨> 中
68.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거꾸로 생각하면 온 힘을 다해 어려움을 헤쳐 나가던 때일지도 모르죠. 이미 지나온 이상,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랍니다. 그런 시간을 지나 이렇게 건재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손님들께서 강하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 이미예, <달러구트 꿈 백화점> 中
69.
"하지만 실제로 손님들을 만나보면, 떠나는 자신은 안중에도 없단다. 그저 남은 사람들이 괜찮기를 바라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가는 건 그런 것인가 보더구나. 나도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 이미예, <달러구트 꿈 백화점> 中
70.
"아시다시피 저는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꿈'으로 작년에 데뷔했어요. 그런데 살면서 한 번쯤은 거쳐야 하는 힘든 시간이 아니라, 굳이 겪지 않아도 될 힘겨운 기억을 가진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저는 스스로가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다면 더 좋겠죠.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상황이라면 더더욱이요. 저는 피해자가 뭘 더 노력하지 않아도 되면 좋겠어요."
- 이미예, <달러구트 꿈 백화점2> 中
71.
언제나 인생은 99.9%의 일상과 0.1%의 낯선 순간이었다. 이제 더 이상 기대되는 일이 없다고 슬퍼하기엔 99.9%의 일상이 너무도 소중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도, 매일 먹는 끼니와 매일 보는 얼굴도. 그제야 여자는 내 삶이 다 어디로 갔냐 묻는 것도, 앞으로 살아갈 기쁨이 무엇인지 묻는 것도 실은 답을 모두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미예, <달러구트 꿈 백화점2> 中
72.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먹고사는 게 힘들어도, 책을 읽는 일은 음악을 듣는 것과 함께 나에게는 언제나 변함없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만은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中
73.
행성 생태계에서 미생물들이 죽음을 다시 삶의 원료로 되돌리듯이 우리는 전 우주적 규모에서 순환의 매개체를 자처하며, 이러한 삶의 방식에 자부심을 가진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기생하여 살아간다.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 김초엽, <방금 떠나온 세계> 中
74.
누군가 나를 구하러 오는 꿈을 꾸지만 깨어나면 나는 다시 멸망의 현장에 와 있다. 죽음은 결코 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이곳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한다. 내가 목격해온 폐허의 적막과 고요는 어디까지나 살아서 그것을 목격하는 이들의 것이었다. 적어도 죽어가는 이들의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다.
- 김초엽, <방금 떠나온 세계> 中
75.
눈이 마주쳤을 때, 로라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씩 웃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여전히 로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동시에 제가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로라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요. 하지만 그걸 깨닫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 김초엽, <방금 떠나온 세계> 中
76.
"이곳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들이 이곳을 덜 미워하게 하지는 않아. 그건 그냥 동시에 존재하는 거야. 다른 모든 것처럼."
- 김초엽, <방금 떠나온 세계> 中
77.
그러나 이제 단희에게도 입자들은 의미라기보다는 냄새에 가까워졌다. 둔감해진 후각기관은 한때 조안이 했던 것처럼, 공기 중에서 어떤 기억과 감정을 읽었다. 입자들이 단희를 그 시절로 데려갔다. 의미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들에게로.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너무 구체적이어서,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장면을. 조안이 말했던 그 공간들로.
- 김초엽, <방금 떠나온 세계> 中
78.
철학에는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정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이 천상의 에테르적 차원에 머물면서 인간이 발견해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가 그것들의 이름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실재"가 된다.
-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中
79.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 남게 해주는 근원.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 구조에 매달리는 것이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中
80.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 W.B. 예이츠의 것으로 알려진 이 인용문을 나는 여러 해 동안 벽에 붙여두었다. 그 다른 세계가 바로 내가 보고싶었던 세계였다. 나는 과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위스키를 마시면서 그 세계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 세계는 아무 데도 없었다.
-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中
81.
그날 언니와 나눈 대화는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사실을 나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러니까,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 백수린, <여름의 빌라> 中
82.
다행히도 화장실의 세면대 위에 그대로 놓여 있던 반지를 찾은 후 우리가 식당 밖으로 나왔을 때 거리에는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어쩌면 좋을지 망설이는 사이, 언니가 먼저 우산을 펼쳐 들고 빗속으로 걸어들어 갔다. 우산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비였다. 언니는 이내 우산을 접더니 비를 쫄딱 맞은 채 나에게 빗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우리는 폭우 속을 달렸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머지않아 거짓말같이 비가 그치고 해가 날 거라는 사실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처럼. 지금도 그날을 추억하면 빗속을 뛰어가는 언니와 나의 모습은 손끝에 닿을 듯 생생하고,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울고 싶어진다.
- 백수린, <여름의 빌라> 中
83.
기때가 되면 우리는 옷가지와 부려놓은 짐을 챙겨들고, 열차에서 내린 후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할 거예요. 풍화된 것들은 바람에 흩어져 없어지고 말겠죠. 그렇지만 나는 덜컹거리는 열차 위에 아직 타고 있고,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당신이나 지호처럼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이 편지를 쓴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요, 베레나, 이것만큼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신의 기억이 소멸되는 것마저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리라고 한다면 나는 폐허 위에 끝까지 살아남아 창공을 향해 푸르게 뻗어나가는 당신의 마지막 기억이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딸이 낳은 그 어린 딸이 내게 그렇게 말한 후 환하게 웃는 장면이요.
- 백수린, <여름의 빌라> 中
84.
다현도 그랬다. 선생님을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안다고 말했다. 왜 '안다는 것'에 그렇게들 집착하는 걸까? 자신을 가장 잘 안다는 다현은 알까. 다현의 죽음에 자신이 그렇게 슬프지 않다는 것을.
- 정해연, <홍학의 자리> 中
85.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잃어가는 과정으로 변질되었을 때 어떤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는지 우리는 많은 일을 통해 배웠다. 부모에게 인정받으려 애쓰던 자녀가 부모를 살해하고, 자신을 무시한다며 이웃 주민에게 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당신은 누구에게 인정받고자 하는가.
그 인정에 중독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 정해연, <홍학의 자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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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구절을 공유하기 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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