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글을 쓰게 됐던 건 스위스로의 이사가 결정된 직후였어. 학교 다닐 땐 독후감으로 상도 받았었고, 나름 글쓰기 자신이 있었는데, 공대를 가고 엔지니어가 된 후로는 설계문서 말곤 글 쓸 일이 전혀 없었어. 어쩜 평생 한국어로 글 쓰는 방법을 더 배워볼 기회조차 없겠단 생각이 들어서 이사 준비로 바쁜 가운데 한겨레 교육원의 에세이 쓰기 수업에 등록했어. 교육원에 다니는 8주 동안 매주 에세이 한편을 숙제로 써갔고 교실에서 낭독했어. 누군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게 좋아서 글을 계속 쓰기로 했어.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하고 몇 번의 계절이 오고 갔어. 학원 숙제로 썼던 글들로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요즘은 매일 너에게 쓰는 엽서를 브런치에도 올리고 있어. 묵묵히 써나가자 생각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요즘은 글 쓰는 게 좀 막막하기도 해.
문제는 쓸 얘기가 없다는 거야. 교육원에 다닐 땐 선생님이 어떤 글을 써와야 할지 말해주셨어. “기억에 남는 추억의 장소”라던가 “자랑하고 싶은 경험”이라던가. 당연히 지금은 아무도 내게 뭘 쓰라고 요구하지 않아. 내 안에서 하고 싶은 말 그리고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할 말을 골라내야 해. 바로 그게 문제야.
브런치엔 에세이가 제일 많아. 그중에서도 직업의 세계를 다룬 업세이가 많고, 드라마틱한 개인사를 담은 이야기도 많아.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 모두에서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없어. ‘빅 테크 기업의 유럽본사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의 업세이’를 간판으로 달까, 잠시 고민했지만, 또 회사 이름을 팔아먹어야 하는 게 자존심 상했어. 그렇다고 나한테 드라마틱한 개인사가 있는 것도 아니야. 해외생활이 좀 특이할까 싶기도 했는데, 그냥 출근하고 퇴근하는 심심한 직장인의 일상이 이어질 뿐이야.
자신 있고 즐거워서 시작한 글 쓰기였는데, 요즘은 둘 다 잘 모르겠어. 브런치 작가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내 글이 세상에 소음을 더하는 일이 아니길 바란다”는 얘기를 브런치에 올린 적 있었어. 이 글은 내가 브런치에 올릴 93번째 글이 될 거야. 혹시 이 글, 너와 나사이에서만 읽혀도 충분했던 게 아닐까? 93번째 소음을 또 브런치에 더하 건 아닐까? 브런치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야.
2022.12.13. 밤에, 유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