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레옥잠의 일기 - 1/12
2024년 5월의 어느 아침, 나는 베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선 봄이 한창이었지만 스위스의 긴 겨울은 아직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던 리마트 강은 회색 안개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기차의 유리창엔 빗방울이 맺혔고, 기차 안은 고요했다. 이민 서류가 가득 든 검은 가방이 내 무릎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나는 그때 스위스 취리히에 살고 있었다. 스위스 이민 후 2년이 지났고, 나는 미국으로의 재이민을 위해, 베른에 있는 미국 대사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취리히에서 멀어져가며 나는 지난 2년을 떠올렸다. 눈이 오면 아파트 안뜰에 나가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곤 했고, 날씨가 좋을 땐 거실에 앉아 알프스 뒤로 떠오르는 해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푸르게 밝아오는 거실에서 일기를 썼다.
미국행을 다짐하게 된 것도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었다. 지난겨울엔 아침 일기를 평소 보다 더 길게 썼다. 어느 날은 노트 석 장을 가득 채울 만큼 쓸 말이 많았다. 창밖은 춥고 고요한데 내 안에 뜨끈한 돌덩이가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며칠을 씨름하다 그 돌덩이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마침내 토해내듯 일기장에 적어 낸 건 “자격지심”이었다.
당시 우리 팀엔 기획자에서 개발자로 전향한 동료가 있었다. 1년 만에 개발 플로우를 모두 파악한 그를 보며 내 안에 습하고 쿰쿰한 감정이 자라났다. 그와 달리 나는 제자리걸음 중이었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개발자로서 거의 비슷한 일을 해온 듯했다. 내 경험이 쌓인 것도 있지만, 도구들도 좋아져서, 최근엔 관성으로 일을 해온 것 같았다. 새롭게 배운 내용을 정리하는 문서에도 몇 달째 추가된 게 없었다. 고민 끝에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머신러닝을 다시 하고 싶단 마음도 고개를 들었다. 마침, 미국 본사에서 머신러닝 엔지니어를 구하는 사내 공고가 올라와 있었다. 미국으로의 이동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력서와 고과 기록을 보낸 후 면접이 이어졌다. 면접이 끝나고 채 10분이 되지 않아 사내 메신저로 합격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축하의 의미로 회사 선배와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그는 얼마 전 필라투스에 놀러 가 함께 찍은 사진을 인화했다며 내게 주었다. 그가 준 사진을 지갑에 넣었다.
베른 가는 기차에서도 그 사진은 내 가방에 있었다. 분주히 달린 기차는 예정된 시간에 베른에 도착했다. 미 대사관은 기차역 근처에 있었다. 비자 인터뷰도 간단한 질문 몇 개로 끝이 났다. 인터뷰어가 말했다.
“굿 럭 인 캘리포니아!”
낯선 도장이 찍힌 서류와 여권, 여권 지갑 속 사진을 다시 가방에 넣고 대사관 밖으로 나왔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지만, 나는 우산을 쓴 채 스위스를 빠르게 지나쳐 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