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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웅

by 이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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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부 수정되어 야놀자 2024 낭만 여행기에 출품되었습니다.


정류장에서 트램을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그가 뛰어왔다. 갑자기 내 손에 작은 종이봉투가 쥐어졌다. 봉투 안에는 필라투스에 놀러 갔을 때 찍은 사진이 있었다.


미국행이 결정되자마자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축하의 의미로 저녁을 함께 먹다가 그가 HER 영화를 봤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가 말했다.

“저는 그 영화 마지막 부분을 두 사람의 세계가 달라지면 상대의 미래를 위해 보내줘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어요.”

그는 칵테일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주고 간 사진 속의 나는 눈이 덮인 필라투스 전망대를 오르고 있었다. 수면 잠옷 위에 패딩을 껴입고 한 손으론 난간을 쥔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필라투스에 가게 된 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주말에 혼자 스위스 이곳저곳을 다니곤 했는데 오는 주말엔 가깝고 케이블카로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필라투스에 가볼 예정이라고 했다. 산 꼭대기엔 제법 괜찮은 호텔 겸 식당도 있었다. 나는 2년간 살았던 스위스를 떠날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고, 아직 눈 덮인 알프스에 가보지 못했다는 게 아쉬웠던 참이었다. 그의 일정에 내가 따라가도 될지 물었고 그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도착한 필라투스 정상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호텔 뒤로 쌓인 눈 더미는 호텔의 2층 창문까지 뒤덮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 기대한 풍경을 보기는 어려웠지만 해발 2천 미터에 위치한 호텔은 한국의 겨울 산사처럼 고즈넉했다. 호텔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우리는 날씨를 확인했다. 내일 아침이면 구름이 걷힐 것 같았다.


이른 새벽 호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깨우러 온 것이었다. 해뜨기 전에 일어나 밖에서 별도 보고 일출도 보기로 했었는데 나는 정신없이 잠들어있었다. 급한 대로 수면 잠옷 위에 패딩을 껴입고 목도리를 둘렀다. 꼴이 우스웠지만 다행히 밖엔 아무도 없었다. 하늘이 조금씩 보라색이 되어갈 즈음 그는 전망대에 올라가자고 했다. 전망대 위에선 병풍처럼 감싼 알프스와 그 뒤로 붉게 올라오는 태양을 볼 수 있을 터였다. 걱정되는 건 계단 위에 쌓인 눈과 20대 막바지에 진단받은 골다공증이었다.


나는 혹여 미끄러질까 한 걸음 한 걸음 신중을 기했다. 내가 망설이자, 그가 손을 뻗어 나를 부축해 주었다. 눈으로 뒤덮인 전망대엔 우리 둘 뿐이었다. 하늘이 천천히 붉게 물들었다. 알프스의 여러 봉우리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서 마치 거대한 티아라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전망대 반대편으로 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름다운 알프스의 일출을 앞에 두고 나는 자꾸 그 뒷모습에 시선이 머물렀다.


사진을 지갑 속에 넣고 트램에 오르자, 그에게서 카톡이 도착했다.

“기쁜 맘으로 배웅할게요.”

나는 답장을 쓰다 지우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트램이 출발하면서 핸드폰을 쥔 손이 가볍게 흔들렸다. 창밖으로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시간이 “배웅”으로 마무리되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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