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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음 Sep 04. 2022

존엄사는 존엄한 죽음을 약속하는 건가요

그럼 사람을 생각한다. 그런 공간을 생각한다.


시간에 따라 잠이 들고, 배식을 먹고, 창밖을 보듯 벽을 보며 순서대로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 그것이 훗날 나의 모습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정한아의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에서 주인공은 요양원을 보며 생각한다.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요양병원으로 옮길 때 많은 노인들은 생각한다. 가족이 자신을 버렸다고. 그리고 그곳에서 타자와 섞여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는 모른다. 그곳의 삶을. 죽음은 늘 지금은 아닌, 먼 미래의 일이 된다.  

삶보다 죽음이 더 존엄하니 죽을 권리를 달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누가 그것을 판단할 수 있을까. 존엄한 삶과 존엄하지 않은 삶, 존엄하지 않은 삶이란 존재하는 것인가.



많은 이들이 '존엄한 죽음'을 떠올릴 때 연명치료 중단을 떠올린다. 현행법은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임종만을 연장하는 목적의 연명의료 중단을 합법으로 하고 있다. 2018년부터 시행된 웰다잉법이다. 그리고 지난 6월 조력 존엄사법이 한국에서도 최초로 발의됐다.


이는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의 자연적인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식 있는 상태에서의 의도된 죽음까지 범위를 넓힌다. 삶이 존엄하지 않다고 여기는 누군가 본인의 의지로 담당의사의 도움을 통해 스스로 삶을 종결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어떤 삶이 존엄하지 않다고 여기는가.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 모리교수는 '죽어간다'는 말이 '쓸모없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모리교수는 "누군가 내 엉덩이를 닦아 줘야만 한다는 사실이 가장 두렵다"라고 말한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쓸모, 효율이란 단어와 계속 멀어지는 일이다. 기억은 흐릿해지고,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기관들이 늘어간다. 타인의 돌봄이 없이는 삶을 지속하는 일이 어려운 일. 그것이 늙음의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여기고, 삶이 존엄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다. 그것은 정말 쓸모없는 일일까.


책 <삶의 격>의 저자 페터 비에리는 인간의 존엄에 대해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내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세 가지 틀로 말한다. 그렇다면 점점 소멸해 가는 사람에게 존엄이란 무엇인가. 정신력이 약해지고, 정체성이 해체돼 나라는 부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때 어떻게 존엄성을 지킬 것이며, 타인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는 존엄사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의 삶이 존재하는 어떤 순간에도 삶의 존엄이 지켜지고 있는가를.


영화 < 죽여주는 여자> 스틸컷

난쟁이 던지기 대회에서 난쟁이는 자신의 몸을 던지게 할 자유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타인의 목적을 위해 이용당하는 존재로 전락한 '난쟁이 대회'는 삶의 존엄을 훼손한다. 여기서 그는 하나의 덩어리, 물체로 존재하며, 타인의 구경거리로 전락한다. 페터 비에리는 말한다. 삶의 존엄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권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라고. 그에게 존엄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장 상위 가치였을 것이다.  


결국 존엄성에 대한 딜레마는 존엄성과 관련된 경험과 존엄성이 속하고 표현되는 삶의 형태,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존엄 이전에 우리는 삶의 존엄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생산성과 효율성을 목표로 달려오는 사이 우리는 노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축적해왔다.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우리의 기대수명은 83.5세(2020년 기준)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두 번째로 길다. 동시에 노인자살률과 노인빈곤율 역시 세계 1위다. 기대수명도 길어졌지만, 그만큼 불행한 노년도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삶이 길어지는 사이 우리는 노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오직 가족의 돌봄에만 노년의 돌봄을, 노년의 존엄을 전가하는 사이 내가 짐이 된다고, 쓸모없다고, 내 삶이 존엄하지 않다고 여기는 노인도 늘고 있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소영은 그런 노인들을 죽여준다. 요양병원에 누워 수치스러운 삶을 마감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노인, 치매에 걸려 스스로를 기억하지 못하는 노인. 소영은 이들에게 농약을 먹여주고, 산 정상에서 떠밀어낸다.


"우리는 저물어 가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편안한 일상을 보낼 수 있게, 곁에 있는 누군가와 마음을 나눌 수 있게, 그리고 그저 수수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렇다. 죽을 권리는 필요하다. 자아를 잃어버린 자는 스스로의 존엄성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독립성으로의 존엄이 훼손된 자는 삶을 굴욕이라 느낄 수 있고, 존엄이 훼손됐다고 여길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아를 잃어버린 자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어떤 감각이, 어떤 신체가 훼손돼도 당신의 삶은 존엄하며, 우리는 그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할 것이라고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가.


"현실이 먼저고, 규범은 부차적 문제여야 한다. 문화와 윤리, 사회적 가치는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여 지속적으로 갱신돼야 한다. 당위적인 윤리는 없다. 목적은 변화를 통해서만 성취돼야 한다" <정희진처럼 읽기>


지금 존엄사는 우리가 당신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되묻고 있다.


참조 - 삶의 격

참조 - 죽음의 격

참조 - 어떻게 죽을 것인가

참조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참조 - 정희진처럼 읽기

참조 - 국가지표체계

참조 -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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