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인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 홀로 남겨진 '나'가 있다. 그의 삶에 나는 아무런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매일같이 그 비참함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이십 년간 일했던 오케스트라에서 해고된 호르니스트가 있다. 둘은 중고 물품 직거래 플랫폼을 통해서 만난다. 타인과의 우연한 만남은 '내 안의 슬픔'을 대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소설 <미스터 심플>은 중거 거래 플랫폼을 통해서 만난 두 사람을 주목한다. 그곳에 자신에게조차 진짜 마음을 내보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가 '진짜 마음'을 내보이는 우연한 사건이 존재한다.
그런 우연한 사건이 가능한가.
현실에서 플랫폼은 일시적인 거래 이외에 어떠한 유대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클릭 한 번으로 나는 대문 밖의 배달음식을 마주하고, 가사노동자를 마주하고, 그와 나의 교류는 오직 별점으로 완성된다. 그렇다면 그의 슬픔은 누구의 몫인가.
그의 슬픔을 본 적 있다. 눈이 온 다음날이었다. 차들 사이를 아슬하게 속력을 내던 오토바이가 파열음을 내며 미끄러졌다. 오토바이도, 사람도, 그의 배달음식도 도로 위에 뒹굴었다.
순간 당신의 표정이 흐려졌다. 때론 찰나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한다. 진실을 말한다. 그날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봤는지도 모르겠다.
횡단보도 위 모두가 당신을 바라봤다. 안타까움의 시선들이 오토바이 위로 쏟아졌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당신의 슬픔은 당신의 몫이다. 신호가 바뀌자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갔다.
왜 그의 슬픔은 오직 그의 몫이 됐는가.
일터는 사라지고, 일만이, 일을 하는 사람만이 남았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그 세계를 담아낸다. 'sorry we missed you'는 영화의 원제다. 이는 택배 받을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때 붙여놓는 메모다. 페트병에 소변을 보고,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물량을 채워야 한다며 리키는 멍한 표정으로 트럭을 몬다. 우리가 진정 놓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신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리키의 면접 담당자는 여러 번 말한다. 함께 책임지는 것은 무엇도 없다. 하루 14시간 주 6일의 살인적인 노동 이후에도 리키에게 휴가는 '주어진 몫'이 아니다. 리키는 자기 돈을 들여 대체기사를 구해야만 휴가를 쓸 수 있다.
누군가는 이를 소풍이라 말한다. 플랫폼 자본의 인력 확보 플랜의 한 축은 노동의 미화 전략이다. 원할 때 하고 싶은 곳에서 하고 싶은 만큼이란 구호를 통해 플랫폼 노동을 '힙'한 문화이자 세련된 노동 방식이라는 이미지를 전파한다. '날씨 좋은 날 소풍 다니듯, 드라이브하듯이 일한다' 쿠팡 플렉스의 전략은 노동을 나들이로 전시한다. 그 과정에서 차량 배송의 위험성과 사라진 일터의 의미는 희석된다.
괴롭힘은 특수하고 일탈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이다. 규율은 오로지 이윤과 효율적 착취로만 존재한다. 플랫폼은 고객 권력을 강화하고, 고객의 명령은 플랫폼을 통해서만 전달되고, 작동방식은 기업이 결정한다. 일과 일터, 고객과 기업, 노동자와 고객의 관계는 뒤집힌다. 기업은 고객의 이름으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책임지지 않는다. 고객은 노동자에게 직접 지시와 명령을 내리는 지위에 오르지만 고객도, 기업도 플랫폼 뒤로 숨어버린다.
그 뒤에는 오직 자족하는 슬픔만이 존재한다. 일하다 다쳐도, 일자리를 잃어도,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슬픔만이 존재한다. 슬픔은 자족할 수 없다. 뒤에 숨어 있을 뿐이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의 구호는 "사람이 먼저다"였다. 그 후 10년, 세상은 반대로 움직였다. 혁신은 전 세계의 주류로 등장했고, 일터는 사라졌다. 노동은 플랫폼에서 초 단위로 거래되는 '상품'이 됐다. 해고할 필요도, 노동법을 지킬 필요도 없다. 대신 노동자에게 '사장님' 이름표를 붙였다.
사람이란 구호 뒤에 남겨진 것은 무엇이었나.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사람'이란 구호를 전면에 내걸고 12년 동안 동일노동 동일임금 실현을 위한 비정규직 차별 철폐 공약을 내세웠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의지는 있었는가. 국회에서 절대 과반을 이뤘지만 차별금지법,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침묵했다. 노동자와 서민을 위태롭게 만드는 체제에 침묵했다. 주식과 부동산에 눈을 떴고, 정치적 동맹을 강화했다. 주거권 보장은 밀어내고 불로소득 자산 계급 이해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남긴 세계는 무엇이었나. 계급의 자각이었고, 각자도생의 삶이었다. 말과 행동이 다른 그들을 욕하면서도, 우리는 학벌과 부동산에 찌든 자신을 되돌아봤다.
같은 해 프랑스 대선 좌파전선 후보 장뤼크 멜랑숑의 공약집 제목 역시 '인간이 먼저'(L’humain d’abord)'였다. 프랑스 사회당보다 훨씬 더 왼쪽에 있는 좌파전선은 세계화와 미국 중심 경제체제에 맞서 '인민을 중심으로' 새 판을 짜겠다고 했다. 그 계획은 5년 뒤에도 계속된다.
경제 자극을 위해 1억 유로를 풀고, EU에서 '프렉시트'하고, NATO에서 탈퇴하고, 연금수령 개시 연령을 60세로 낮추며, 일주일 근로 시간을 32시간으로 하겠다고 공약한다. 또 그는 경기부양 예산 2천73억 유로를 배정해 공공주택을 추가로 짓고, 각종 공공사업 및 그린 프로젝트에 집중한다고 했다.
"대선이 4주 앞으로 다가왔지만, 유권자의 47%가 유동층이라는 것은 얼마나 혼란스러운 상황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집권 사회당 후보 브누아 아몽을 제치고 4위권으로 부상한다. 프랑스 유권자들의 올랑드 정부에 대한 실망, 아몽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이 그의 계획에 힘을 더했다.
우리에게 그런 세상은 오는가.
그 속편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그런 후보는 있는가.
애매한 구호는 사라졌다. 대신 '나'가 전면에 등장한다.
'내가 행복해지는 내일' '나를 위해, 이재명'. 전자는 윤석열 후보의 슬로건이며, 후자는 이재명 후보의 슬로건이다. 그것은 유권자들의 투표기준이 '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가'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의 가족'이라 말하면서 결코 노동자의 가족이 되지 않는 삼성의 광고처럼 알량한 구호는 사라졌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대놓고, 말한다. 우리는 이제 각자의 세상으로 갈 것임을.
그것이 남길 세상은 무엇인가.
"플랫폼은 인간의 일상 전체를 디지털화된 데이터로 확보하고 여기에 노동을 접속시켜서 이 연결을 이윤의 원천으로 삼는다. 플랫폼은 그 거대하고 치밀한 망(網) 안으로 들어오는 노동자들의 시간과 기능을 세분화해서 자기 착취의 구도 안에 가둔다. 플랫폼에서 노동자들은 플랫폼에 고용되어 있지 않고 스스로 사장이며 고립무원의 단독자이다" <김훈>
그렇다면 우리는. 손쉽게 플랫폼의, 그들의 반대편에 서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우리의 몫을 찾아올 수 있는가. 택배기사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려면 노동자를 추가 고용하거나 처우를 실질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그것은 불편한 일이다. 그것은 현명한 소비자가 아닌 동료 시민으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그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세금을 더 걷는 일, 손해를 감수하는 일, 그 불편한 진실은 표심을 얻는 데 도움되지 않는다.
"The stakes of the film are simultaneously huge and small. The Turners don’t need much. Some stability; a steady income, of course; more time would be a dream. Really, though, the most precious thing they have is each other. But there’s no time for that because then there’d be no money" <‘Sorry We Missed You’ Review: The Human Toll of That One-Click Buy>
거대하면서도 작은 것들, 소중한 것들. 한 끼의 식사, 약간의 안정성, 꾸준한 수입, 그리고 가장 소중한 것은 서로입니다. 그러나 돈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겐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영화 ‘Sorry We Missed You’ 리뷰에서 말한다.
작지만, 소중한 것들. 누군가 우리 뒤에서 그 '시간'을 빼앗아가고 있다. 그리고 침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