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포그너의 헛간 방화,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
모든 결과와 사건 그리고 어떠한 현상을 바라봄에 있어서 사람들은 혹은 혼자서라도 제각기 다른 원인과 이유를 따질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시각으로 관찰하는 것은 사고자의 사고체계, 자라온 환경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 등 수많은 요소에 의해 영향받아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1954년에 태어난 이창동이 바라본 청년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1. 사람은 믿고 싶은 마음으로 간다.
우물과 고양이는 종수로 하여금 판단에 있어 많은 혼돈을 준다. 여러 갈래의 믿음 속에서 하나를 믿고 정진해야 한다면, 어떠한 믿음을 선택할 것인가?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도 현혹되기 쉬운 존재이기에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된다. 최대한 이성적인 마음을 움켜잡고 객관적으로 사고하려 하지만 자신이 믿고 싶은 것에 조금이나마 연관된다고 생각되는 증거거가 존재한다면 그러한 방향으로 마음이 간다.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믿고 있는 사실이 과연 진실일까? 진실은 어떻게 진실이 되는 걸까? 영화는 다양한 장치를 사용하여 물음을 던진다.
2. 종수와 종수의 아버지
종수는 대한민국의 남성 청년이다. 특별한 직업은 없으며 배달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는 돈, 직업, 자아실현, 모친, 애인 등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다. 특히, 모친의 부재로 사랑에 대한 감정적인 부분에 있어도 많은 결핍이 있다. 극중에서는 남매라고 말하고 있지만 누나의 존재 또한 등장하지 않으며 부재를 나타내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영화에서 집안의 환경으로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종수의 말에 의하면 분노조절장애가 있다는 아버지는 공무원을 의자로 폭행하여 구금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부재에 종수는 우연히 찾은 금고의 열쇠로 아버지의 금고를 열어보게 된다. 그 안에 있던 것은 바로 전술용 나이프들이었다. 종수의 아버지 마음 깊은 곳에는 분노가 가득차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종수의 아버지는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였으며 중동의 건설 현장에서 노동을 했던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 많은 기여를 했던 애국자였다. 하지만 5.18 민주화 운동에서 계엄군이기도 하였다. 국가를 위해서 옳고 그름을 떠나 시키는 일을 모두하며 희생한 한 남자였지만, 국가는 더 이상 이러한 남자를 필요하지 않았다. 중동에서 벌어온 돈으로 강남 아파트 한채사는 것을 거부하고 고향에서 축산업을 위해 귀향했다. 하지만 현재 종수의 아버지의 집에는 북한 대남방송으로 소음이 밤낮으로 들리고 있으며, 그가 가진 것이라곤 꺾이지 않는 자존심과 한 마리의 암소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종수의 아버지의 국가에 대한 희생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고 이미 분노가 가득차있었다. 아버지의 분노는 국가의 일을 수행하는 공무원을 폭행함으로써 분출되었다. 이와 대비하여 종수의 집의 텔레비전에서는 대한민국 청년 실업 문제에 대한 내용과 미국의 자국민 우선주의 성향을 가진 트럼프가 미국 국민을 위한 연설에 대한 보도가 흘러나온다. 영화는 간접적으로 대한민국 남성들이 행해온 희생에 대한 부족한 대우를 비판하고 있다. 종수의 아버지는 과연 분노조절장애로 공무원을 폭행한 것인가? 종수의 집의 미장센과 종수의 아버지에 대한 설정은 설명이 많지 않고 간접적으로 몇초동안만 보여주고 지나가기에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러한 작은 부분에서도 의미를 담고 있는 이창동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깊이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3. 해미의 방
종수의 모성애의 결핍에서 영화 시작 부분에서 만난 해미는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게 된다. 종수가 해미에게 빠지는 사랑은 너무나도 쉽다. 배고픈 헝거에게 음식과도 같은 존재였다. 해미의 방은 북향이고 늘 춥고 어둡다. 하지만 하루에 딱 한번 햇빛이 방에 들어온다. 그 햇빛은 남산타워 전망대 유리에 반사된 햇빛이다. 자신의 방에 햇빛은 들어오지 않지만, 햇빛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반사된 내 방에서 해미만 알고 있는 밀양(密陽)이다. 그 햇빛은 아주 잠깐 방에 들어오기 때문에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 종수에게 있어서 해미는 운이 좋아 들어온 햇빛이다. 해미의 방에 들어온 종수는 해미와의 사랑에서 서툰 모습을 보여준다. 콘돔을 착용하는 신을 길게 보여주는데, 이 또한 종수 혼자 하지 못하고 해미의 도움을 받아 착용한다. 종수에 사랑은 이처럼 서툴고 능숙하지 못한다. 콘돔 또한 침대 밑 고양이의 배설물 상자 옆에서 꺼낸다. 이처럼 인간의 가장 큰 욕구인 수면욕(침대) 밑에 있는 성욕과 배설욕과 같은 욕구는 침대 밑과 같은 음지에서 해결된다.
그렇게 성관계 중에 종수는 창 밖을 바라보며 남산타워에 비친 햇빛을 본다. 방 안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인 옷장 속까지 비치던 햇빛이 점점 사라지는 것은 종수에게 있어 해미 또한 찰나의 순간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장치라는 생각이다. 종수는 두 가지 착각을 하고 있는데 한 가지는 해미의 방이 자신의 방으로 여기는 점과 해미의 사랑이 진실이라는 착각이다. 이는 해미의 방에서 자신의 방처럼 은밀한 행동을 하는 것과 진짜 햇빛이 아닌 반사된 햇빛을 통해 말하고 있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햇빛은 존재하지 않고 비가 와 버스 정류장으로 피하는 종수를 보여주며 햇빛과 대비를 전달한다. 종수는 해미의 고양이의 밥을 챙겨주러 해미의 방에 왕래한다. 종수는 해미가 없는 해미의 방에서 매번 남산타워를 보며 자위행위를 한다. 그러나 비치는 햇빛과 해미는 존재하지 않았다.
4. 벤은 어떠한 존재인가?
아프리카 여행에서 해미가 만나 같이 돌아온 사람은 벤이라는 남자다. 벤은 삶이 풍족하다. 어떠한 것에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환경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왔으며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타인의 혹은 자신이라 할지라도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는 싸이코패스의 증상이며 벤은 그러한 사람이다. 불편이라는 감정은 섣불리 정의하기 어렵지만 벤은 종수와 관객에게 불편을 주는 존재이다.
불편의 종류는 다양한데, 불편 중의 한 예시인 불편한 진실은 대게 많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지만 당당하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불편함의 근원은 바로 인간에 모순성에 기인한다. 표면적인 것과 그 속 안에 내제되어 있는 사실이 너무나도 다르지만 누구나 알기에 말하기 꺼려지는 것이다. 사회에 있어서 결핍과 충족된 자 간의 관계는 불편하다. 부라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노력으로 성취한다는 개념이 아직 팽배한데, 자신이 이룬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부를 갖는 것은 모순적인 것이 된다. 청년이 속한 집단에서는 개인이 가진 것들은 대게로 내가 이루어서 성취하지 않은 것이고 상속에 기인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자신의 능력에 의해 성취하고 갖은 것들은 일반적으로 불편하다고 인식되지않는다. 하지만 이 또한 같은 준거집단에 속해있다가 능력의 차이에 의해 결핍과 충족이 존재하는 순간 불편한 관계가 생성된다. 인간의 비교와 우위 관계는 준거집단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개인의 삶은 대부분 정해진다.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지만, 평등한 사회가 된다면 준거집단 내의 타인과의 우위를 만끽하지 못해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끼기 어렵다. 평등을 지향한다는 것은 배부른 자의 가볍고 쉬운 성공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무언가 성취하고 소유하기 위해 평등이란 사회적 바탕은 꼭 필요한 것이다. 사회는 불평등하고 이를 위해 해결하는 노력은 존재하지만 미비하다. 평등은 오히려 사회에 있어 인간의 욕구에 불필요한 것이고 권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기에 우리는 불평등한 사회를 불편한 진실로 남기는 것이다.
벤은 겉과 속이 다른 모순적인 남자다. 피상적으로는 매력이 있고 타인을 존중해 주는 스탠스를 취하지만, 종수의 트럭 안에서의 전화 그리고 종수를 대하는 태도에서 은연 중의 종수를 묵살하는 행동은 관객과 종수에게 불편함을 준다.
벤은 트럭의 뒷좌석에 앉아 있으며 안전벨트를 하지 않고 통화를 하고 있다. 트럭이라는 노동의 상징인 차량에서 해미와 종수는 안전벨트에 의해서 묶여 있지만 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통화 내용은 타인의 무시하고 깔보는 대화 내용이며 이는 벤의 속모습을 자연스레 드러낸다. 그렇게 종수는 벤에 대해 불편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환경이 구성된다. '벤이 나에게 대하는 행동이 과연 진실인가?', '나에 대한 판단도 저런 비난적인 내용인가?'와 같은 물음이 뒷따를 수밖에 없다. 표리부동한 벤이 주는 불편함은 다양하다. 근본적으로 종수가 중요시 여기는 감정들을 중요하기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이 감정에 따라다니고 행동하는 것이 구경거리일 뿐이다. 애지중지 여기는 물건을 보잘것 없이 보거나, 태생이 다름을 강조하거나 무엇보다 종수의 트럭에서 자신의 포르쉐로 해미를 옮겨 집으로 데려다주는 행동은 종수에게 상당히 아픈 감정을 준다.
벤이 해미의 손금을 해석해주는 장면이 있다. 손금이라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서 태어나며 나 자신의 의지와 생후의 행동에 있어서 어떠한 연관관계가 없다. 그러나 벤은 손금을 보고 특별함을 찾아내거나 타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에 손금이라는 근거를 부여하여 자신의 생각을 해미에게 말한다.
이후 장면에서 벤은 자신이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 요리는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하고 덧붙여서 더 좋은 것은 마음대로 만든 물건을 먹는다는 것이라고 했다. 먹다는 것은 자신의 충족을 위해 음식을 소화시켜 없애는 행위이다. 벤은 자신이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해미 또한 자신이 만든 요리처럼 손금을 통해 생각하는 마음대로 정의했고, 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먹어치워 없애고 싶다는 욕구가 기저에 깔려있다는 느낌을 준다.
영화 중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불편함 감정은 두 가지로 나뉜다.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자의 공간에 갔을 때, 그리고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의 공간에 갔을 때이다. 종수는 반포에 있는 벤의 집과 벤의 친구들을 만났을 때와 갑자기 벤이 자신의 집에 방문했을 때 이 두 가지 상황을 거치며 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벤이 종수에 집에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청년의 분노는 어떻게 끓는점에 도달했을까.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