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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별 Oct 28. 2023

홍성에서 미술관 가기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 임선이 개인전

 

 홍성으로 떠나기 전날, 학교에서 억울해도 참아야 되는 씁쓸한 일이 생겨 마음이 착잡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음날 반가운 지인이 기다리는 홍성으로 가 같이 전시보고 수다떨며 털어버릴 생각을 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충남 홍성군에 있는 고암 이응노 생가 기념관은 건축 디자인이 멋드러진 전원 속 미술관인데 그곳에서 동시대적 감각을 지닌 주목할만한 작가의 전시가 열린다는 지인의 소개를 듣고 함께 방문했다. 참고로 그 지인은 요즘 나와 여러 전시를 함께 준비하고 논의하는(게다가 사적인 수다를 장시간 떠는 편안한 관계이기도 한) 큐레이터님이다. 우리는 전시를 함께 본 뒤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작품을 통해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전시 전체의 큰 주제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지 이야기 나누기로 했다.



현대적인 건축물인 고암 이응노 생가기념관 모습



  미술관의 이름이 시사하듯 이 건물은 1904년 홍성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하신 고암 이응노 작가를 기념하는 곳이다. 강렬한 서예 필체를 연상시키는 문자 추상, 군상 등 현대 미술 걸작들을 남기신 고암을 기리는 장소인 이 곳에 현재 6번째 고암미술상 수상작가인 임선이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포스터에는 전시가 2023년 10월 22일까지 열린다고 적혀 있었는데 관객들의 반응이 좋아서인지 10월 29일까지로 기간이 연장되었다고 한다. 내가 곧바로 글을 쓰지 못하고 전시 마치기 전날 밤에 리뷰를 올리는 점이 아쉽지만 홍성 다녀온 직후 폭풍 업무와 학부모 상담, 참관 수업, 체육 대회 등으로 정신이 쏙 빠진 바람에 늦어졌다. 임선이 작가의 경우 이번 개인전 이후로도 계속 작업을 통해 자신의 영감을 꾸준히 알릴 역량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 나를 포함한 현대 미술 애호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의 행보를 지켜보면 좋을 것 같다. 


  미술관 주차장에서 내려 걸어들어갈 때 가장 먼저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세련된 건축 디자인 이전에 주변의 광활한 자연 풍광과 실물로는 처음 접하는 핑크뮬리였다. 미술관 앞 너른 벌판에는 초록의 식물들, 탐스러운 열매가 맺힌 모과 나무, 입체 작품들, 야간을 밝히는 조명 등이 펼쳐져 있고 쨍한 분홍색 핑크 뮬리가 바람에 물결 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SNS 속 피사체들의 포토존으로 유명하다고 알고 있는 신비로운 식물을 갑작스레 여기서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했다. 일렁이는 분홍색 물결 너머에는 조성룡 건축가가 설계한 세련되면서 화려하지 않은 현대적 건축물이 주변 풍광과 조화를 이루며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가을날 전원 풍광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질 수 있어 뜻밖의 선물을 받는 느낌이었다.



핑크뮬리와 시원한 전원 풍광


 미술관의 내부는 천장이 높고 공간이 잘 구성된 것 같았다. 작품 사이의 간격이 여유있어서 쾌적하게 감상하기 좋았다. 제 6회 고암미술상 수상작가인 개인전의 주인공인 임선이 작가는 조소를 전공한 분이라고 들었는데 입체, 설치, 사진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작업을 하시는 분이었고 전시장에 그동안 해온 작품들의 사진과 영상들이 있었다.


산수화인듯 독특한 지형도 사진 작품

 전시 포스터와 플랜카드에서 보았던 기이한 산수화같은 사진은 알고보니 지형도를 겹겹이 쌓아올린 뒤 지형 모양대로 오린 입체 작품에 안개같은 연기를 추가하여 촬영함으로써 조선 시대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작품이었다. 작품 재료를 선정한 참신한 아이디어와 작품 시리즈의 소제목인 '걸어가는 도시 흔들리는 풍경'이라는 묘하게 잘 어울리는 제목 등에서 작가가 고심해서 주제를 표현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18세기 화가들이 우리 나라의 진짜 풍경을 담아냈던 진경산수화마냥 현실 속 지형을 사실 그대로 반영하는 기호의 모음인 지형도를 이용한 21세기형 진경 산수화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의 삶, 누군가의 부재를 작품 주제로 삼은 '바람의 무게-# 여행자의 시간'이라는 사진 시리즈는 작품이 주는 여운과 함께 부재 자체를 작업에서 다룰 수도 있구나 하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했다. 역시 제목이 다소 문학적이면서 작품을 품어낸다는 느낌.


작가의 팜플랫에 담긴 설치 전경

 작품에 담긴 내용이 심오하다는 인상을 받은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과거에 작가가 전시했던 설치 작품을 영상으로 상영한 ' 녹슨 말 - # 기억하는 숨'이었다. 어둠 속에 여러 개의 샹들리에가 무심하게 바닥에 놓여 있거나 공중에 매달려 있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설치되어 켜짐과 꺼짐의 반복을 계속하다가 어둠으로 환원되는 모습. 샹들리에라는 화려한 형태를 사용하여 켜졌을 때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아우라를 자아냈으며 서로 힘겨운 대화를 나누듯 교대로 깜빡이다 꺼지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녹슨 말이라는 표현은 누군가의 유언일 수도 있고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는 무의미한 독백이 될 수도 있는 등 보는 관객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임선이 작가가 고심해서 지어낸 작품과 전시 제목 등이 문학적인 상징성을 지니면서도 너무 난해하지 않고 작품을 직관적으로 드러내준다는 점이 인상 깊어 그러한 방식을 배우고 싶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만 좋아했지 작품의 컨셉을 잘 잡아 제목, 주제가 조형과 조화를 이루게 하는 일과 전시를 기획하는 역량 면에서는 서툴기 때문에 앞으로 공부할게 널렸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요즘 작가 인터뷰 영상을 보면서 그 분들의 작업관이나 기법 등을 조금씩 연구하고 있다.


 임선이 작가의 전시를 화두로 던져 나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신 큐레이터님과 함께 전망 좋은 카페로 이동해 전시에 대해 수다떠는 것으로 홍성에서의 토요 문화 생활을 마무리했다. 전날 나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던 일 따위는 커피 한 잔을 음미하고 브라우니의 앙증맞은 패키지에 감탄하는 동안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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