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CA문신 '우주를 향하여'전 연계 특별공연
살짝 걸음을 잘못 디디면 미끄러질 듯한 살벌한 빙판길에 꽉꽉 껴입어도 온몸이 시리기만 한 냉동 바람. 작년 12월 14일은 겨울로 접어 든 뒤로 가장 추운 날씨였지만 밤에 힘겹게 찾아간 덕수궁의 모습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MMCA(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그동안 잘 볼 수 없었던(아마 최초일지도 모르겠다.) 이례적인 다원예술 행사가 열렸고 그 행사의 기획자가 바로 친구인 정지선 감독이었기 때문에 날씨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용기내어 찾았다. 서울 덕수궁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면서 1시간 이상을 가야 하지만, 매일 운전하며 출퇴근해서 그런지 1시간 남짓 가야하는 서울행 지하철 여정이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차를 놓고 다니니 평소와는 다른 여행같은 느낌이 들어 지하철 이용을 즐기는 편이다. 수지에서 서울로 가는 경우 문화 향유를 위한 일정 즉 내가 좋아하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즐거움이 배가 된다.
이날은 지난 9월말 게토 얼라이브에서 프리재즈의 신세계를 맛본 이래로 또 한번 색다른 음악 아니 다원예술의 세계에 진입한 날이었다. ‘문신: 우주를 향하여’ 전시와 연계하여 전시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프리재즈 삼중주 연주 그리고 현대 무용 공연이 미술관 로비에서 펼쳐졌다. 날씨가 날씨인지라 분명 관객이 적겠구나 생각했던 오판과 달리 1층 로비와 2층 난간까지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곧 공연이 펼쳐질 장소에는 마이크, 건반 악기인 비브라폰, 더블베이스 등이 놓여있었고 관객들이 적당한 여백을 두고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싸자 공연 시작 시간이 되었다.
흰 수염과 모자에서 포스가 느껴지는 최선배 연주자와 함께 젊은 연주자들이 입장했다. 최선배 연주자는 독학으로 재즈를 배워 50여년간 한길을 걸어온 한국 프리재즈계의 역사시라고 한다. 1시간 가까운 연주 시간 동안 크고 작은 트럼펫 2가지와 하모니카, 나중에는 비닐 호스까지 사용하며 다채로운 관악기 소리의 향연을 들려주셨다. 연주자의 독창적 호흡 방법으로 악기의 고유한 음을 벗어나 효과음 같은 신기한 소리가 날 때도 있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부조리한 동작의 현대 무용 공연과 잘 어우러진다는 느낌이었다. 베이스 연주자 또한 악기의 전형적인 연주 방법을 탈피한 자유로운 방식의 소리들을 들려 주었다. 비브라폰 연주자는 20세기 초 모던 보이같이 잘 빗어넘겨 붙인 머리와 단정한 정장 차림새를 하고 시종일관 차분한 표정과 자세로 건반을 두드렸다. 끝 부분에 빨간 공 같은 것이 2개씩 달린 채를 양 손에 들고 청량한 소리를 내며 불협화음과 부조리 무용이 펼쳐지는 존재감이 강한 공연의 배경을 맑게 깔아 주었다.
무용과 행위 예술 사이 그 어딘가 위치할 어찌보면 제멋대로의 몸짓을 하는 마른 체격의 공연자의 손짓, 발짓을 보고 있자니 비언어적 방식으로 전시의 메시지를 전달 받는게 어떤건지 알 것 같았다. 얼마전 읽은 소설인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언어가 다른 사람들끼리 우연히 만나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함으로써 완전히 이해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무용가의 몸짓은 구체적인 행위를 표현하지 않았지만 문신 작가가 작품 속에 담은 원초적, 우주적 메시지가 소리없는 절절한 외침으로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내가 미술관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연주자들을 정면에서 볼 수 있는 맨 앞 명당이 비어있었기 때문에 신나게 자리잡았지만 나의 뒤로 관객들이 중첩되다보니 나중에는 앉기가 애매한 상황이 되어 50여분 내내 어정쩡하게 서서 관람했다. 스탠딩 콘서트가 가진 다리 아픔이라는 맹점에 더해 나중에 정지선 감독이 인사를 할 때 너무 가까워서 예쁜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주지 못한 미안함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외에는 공연자들이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있다보니 그들의 열정에 동참하기 좋았고 관객이 아니라 공연의 끝자락 작은 일부가 된 기분을 느끼며 스탠딩 콘서트 명당의 이점을 누렸다.
미술관 밖의 날씨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강추위였지만 공연자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뜨거웠고, 밤이 내린 덕수궁은 고풍스러운 장소였지만 덕수궁 미술관의 공연은 전위적이고 미래지향적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신기했다.
밤의 궁궐 미술관에서 펼쳐진 멋짐이 흘러넘치는 공연과 그것을 기획한 친구를 보면서 ‘예술을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저 좋아서 예술에 발을 들이는 사람은 많지만 다수가 처음과 다르다고 생각해 스쳐 지나가고, 어느 정도 예술 비스무리한 걸 하다 말다 하면서 변방에 떠돌다 간헐적으로 발을 담그는 나같은 사람도 있다. 친구처럼 자신의 전부를 갈아 넣어 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을 뚝심으로 걸어가다보니 그것이 쌓여 인정을 받고 많은 이들에게 오늘 같은 특별한 날을 선사하는 사람도 있고.
예술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처음에 사랑했던 마음 이상의 계속 해나가는 뚝심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과 첩첩이 쌓이는 시간의 연륜이 꽤나 중요한 분야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전위적 다원 예술 공간인 게토 얼라이브를 열어 운영하면서 눈물도 많이 흘리고 긴 시간 자신을 쏟아부으며 예술의 길을 걸어갔던 친구나 새로운 음의 세계를 연구하기 위해 악기와 독대하며 수십년간 조용히 파묻혀 연주에 몰두했던 강태환 연주자와 최선배 연주자들의 삶에서 배울 수 있는 예술가라는 존재. 예술이 좋아서 발을 들였고 인연을 맺었으면 그 길을 지키고 쉽사리 떠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관객으로 참여했던 친구의 다원 예술 공연에서 얻은 고마운 깨달음이었으며 나의 여생에 계속 상기하며 살았으면 한다.
공연을 보고 난 뒤 미술관 닫는 시간 전까지 한 시간 남짓 '문신: 우주를 향하여' 전을 둘러보며 심오한 예술 세계를 독보적 스케일과 개성적인 표현으로 구축한 작가의 세계에 감탄했다. 그 날 주어진 시간에만 둘러보기에는 아까운 전시라고 생각되서 1월에 꼭 다시 찾기로 했다. 그 때는 문신 작가의 작품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읽고 그가 생각했던 방식으로 생각해 보고 오래 보며 공감하면서 그의 예술의 깊이를 더 헤아려 보았으면 한다. 전시 제목과 같이 이날 보았던 공연과 같이 단순한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우주적인 스케일이 담겨있는 전시.
고종의 황궁이었던 덕수궁의 겨울 밤은 시리지만 화사했다. 정갈한 옛 궁궐 경내에 자유분방한 프리재즈가 울려퍼지게 한 친구의 대범한 기획, 행사를 의뢰하여 20세기 위대한 미술가의 전시를 관객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도록 참신한 발걸음을 내딛은 큐레이터님의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