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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별 Feb 03. 2023

게토에서 프리 재즈에 빠진 날

9월 강태환 트리오 공연/ 성수동 게토 얼라이브


 프리재즈라는 음악 장르를 처음 듣고 떠오른 생각은 정말이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


 2년전 성수동의 게토 얼라이브 공연장에 친구를 보러 방문할 일이 있었고 다음번 방문 때는 거기서 공연을 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9월의 마지막날이자 나의 스케치 전시가 끝나는 날을 기념하여 전시를 협업했던 기획자님을 초청해 전시 쫑파티라는 명분으로 공연장을 찾았고 그날 우리가 본 공연은 강태환 트리오의 프리 재즈 공연 '시원음'이었다.



게토 얼라이브의 다른 공연 모습(출처: 게토 얼라이브 홈페이지)

 서울숲 전철역 출구와 멀지 않은 건물의 지하 1층에 위치한 게토 얼라이브는 다른 곳에서는 찾기 힘든 독보적 개성을 지닌 장소다. 계단을 내려가면 자유분방한 물감 드리핑으로 칠해진 벽면과 날 것 그대로의 천장, 그와 어울리는 듯 안 어울리는 듯 아슬아슬한 조화를 이루는 감각적인 조명 장식이 낯선 매력을 풍긴다. 여기 저기 붙인 공연 포스터가 눈에 들어오면 이곳이 힘차게 심장이 뛰고 땀냄새가 나도록 활발히 운영되는 동시대 예술 현장이구나 짐작하게 만든다.





게토 얼라이브 공식 홈페이지 첫 화면


 게토 얼라이브의 주인장은 나의 친구인데 공연이 시작되기 전 설레는 시간에 그 친구가 내 옆을 지나가면서 ‘오늘 신세계를 경험하게 될 거야.’ 라는 의미심장한 귓속말을 던지고 갔다. 예측 안되는 음악 공연이라니 게토의 첫 방문일에 경험하기에 괜찮은 선택이었군 생각했다. 잠시 후 70대 정도로 보이는 노장 색스폰 연주자가 중앙에 설치된 좌판에 신발을 벗고 앉으셨고 무용이든 극작가든 화가든 예술가 포스가 물씬 나는 타악기 연주자가 드럼 앞에, 은빛이 돌만큼 밝은 금발의 단발과 찢어진 청바지 등 매무새가 평범치 않은 피아노 연주자가 피아노 의자에 위치하셨다. 세 분이 작은 목소리로 짧은 한담을 나누신 뒤 침묵이 흘렀고 기묘한 색스폰 소리와 함께 공연이 열렸다. 





작년 12월 강태환 트리오 공연 모습(출처: 게토 얼라이브 홈페이지)

 그간 대규모 브라스밴드를 제외하고 색스폰 연주조차 관람해 본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무엇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소음 같은 색스폰 소리가 편하지 않았지만 계속 듣다보니 뿔피리 소리, 뱃고동 소리, 전통 악기인 대금 소리를 연상시키는 그 소리에 점차 적응되어 갔다. 보통의 사람이 하기 힘든 긴 호흡으로 색스폰을 연주하시는 강태환 선생님은 중앙에서 지휘자처럼 음악의 큰 흐름을 주도하셨고, 타악기를 연주하시는 박재천 선생님은 드럼을 드럼채로 두드리거나 빗으로 쓸어내리는 등 넓은 스펙트럼의 타악기 소리를 만드시며 드럼을 가지고 노셨다. 피아노 연주자인 미연 선생님은 두 연주자의 개성 강한 음악을 부드럽게 감싸는 연주를 하시거나 때로 강렬한 클라이막스로 전체를 장악하는 독주를 통해 음악의 완급을 조절하셨다. 재즈를 많이 들어보지 않은 나에게 재즈라는 단어에 가장 부합하는 듯 들리는 피아노 연주는 그 자체를 따로 떼어 재즈 콘서트를 열어도 좋을 만큼 풍부한 음악이었다. 짧은 휴식이 있긴 했지만 거의 2시간을 가득 채운 세 분의 연주는 새로운 음악의 충격, 다양한 음의 세계의 발견이었다. 연주를 마칠 때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갑자기 끝났는데 프리 재즈에 어울리는 위트있는 마무리라고 생각되었다. 



 색스폰 연주자 강태환 선생님은 젊은 음악도들 사이에서 마니아층을 형성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그날도 앳된 20대 청년들이 악수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자기 순서가 오면 구십도로 인사하며 쑥스럽게 악수하는 모습이 거장을 존경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나와 기획자님은 모처럼 경기도에서 서울의 성수까지 넘어온 날이었기 때문에 낯가림 따위는 접어두고 넉살 좋게 연주자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함께 사진도 찍고 했다.

 타악기 연주자 박재천 선생님은 전주 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맡으신 영향력 있는 음악가이신데 우리와 대화하실 때 겸손한 태도로 말씀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국내외 미술관에서 다수의 공연을 한 경험을 이야기하시며 미술 전공자들과의 공감대를 표하셨다.


동아일보에 실린 강태환 트리오


 강태환 선생님께 다가가 말을 붙이니 자신의 연구실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음을 연구하신다는 것과 게토 얼라이브에서 계간 공연을 할 때만 다른 두 연주자들과 조우를 한다는 사실 등을 알려주셨다. “예술가는 가난해야 되요.” “연구해야지 누구 가르치거나 다른 거 할 시간이 없어.”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 분은 새로운 음을 창작하는 일에만 집중하며 인생을 바치신 순수한 예술가였다.  친구는 강 선생님께서 도인처럼 틀어박혀 수십 년간 소리 연구에만 몰두하신 기인 같은 분이며 이분의 아우라에 열광하는 젊은 추종자들이 멀리 세종시나 부산에서도 공연을 보러 온다고 귀띰해 주었다. 


 제대로 된 재즈 공연도 많이 접하지 않은 데다 프리재즈라는 장르는 처음으로 들어본 내가 음악가(정확히는 다원예술가)친구를 둔 덕분에 어색함을 덜고 예술가들과 대화를 나누며 음악 이야기를 하다니 이런 영광이 있을까. 그 날 세 분이 엮으신 프리 재즈는 추상화 같은 비정형의 음악이면서 수십 수백의 레이어가 겹쳐 깊이를 알 수 없는 회화 작품 같았다. 시각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기 좋은 매력적인 음악이라고 느껴졌다.



 아쉽게도 피아노 연주자 미연 선생님은 연주 직후 자리를 뜨셔서 대화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관객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화사한 미소와 목례로 관객들 한 명 한 명을 존중하는 비언어적 표현을 아끼지 않으셨던 그분과도 언젠가 이야기 나누고 싶다. 나중에 관심을 가지고 연주자들에 관해 검색해 보니 피아노 연주자 선생님은 타악기 연주자 선생님과 부부셨고 ‘미연 앤 박재천’ 이라는 프리 재즈 그룹으로 함께 활동하고 계셨다. 


 유대인의 은신처 게토에서 이름을 딴 성수동 게토 얼라이브에서 난생 처음 프리재즈에 빠졌던 시간은 한동안 나의 삶에 적지 않은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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