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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별 Oct 29. 2023

밤의 미술관에 울린 재즈

문화가 있는 날 미술 전시와 재즈공연 <찬란한 유산>


  올해부터 수원에 근무하고 있다. 

 온라인 서비스로 공지사항, 정보들을 하루에도 여러 건씩 받고 있어 여느 때처럼 무심하게 화면을 스크롤하며 확인하던 중 나의 문화 편향적 레이다망에 걸린 수원 소식이 눈에 띄었다.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에 수원시립미술관에서 하는 재즈 공연.


 작년에 게토 얼라이드에서 프리재즈 공연을 인상깊게 본 뒤로 재즈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했지만 라이브 공연을 찾을 기회가 없었는데 우연히 포착한 이 공연은 꼭 가야겠다 싶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 주 평일은 학교 일정이 만만치 않게 바쁜 기간이었다. 월요일 체육대회, 화~금요일에 수업 공강 시간 내내 학부모님과 상담을 해야 하는 학부모 상담주간이라고 쓰고 담임 교사의 고난주간이라고 읽는 그런 시기.


 잠깐 갈등했지만 수원에 발령받은 뒤로 이 지역 미술관을 가보고 싶었던 바람과 저녁에 미술관에서 무료 재즈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분주한 일정 쯤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10월 25일 수요일 아침부터 빈틈없이 알찬 하루를 잘 보낸 뒤 조퇴를 달고(화요일에는 반대로 초과 근무를 달고 야근을 했지..) 수원시립미술관으로 go~ 야호!


  기분 좋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도착한 미술관 주차장은 만차.


 주변에도 주차할 마땅한 장소가 보이지 않아 한참을 헤매다가 미술관 안내 데스크에 전화를 걸어 근처 5-10분 거리의 팔달구청 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고 다행히 집으로 가는 일은 면했다.


 어스름이 드리워진 팔달구 정조로의 행궁 주변을 압도하며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현대 건물이 수원시립미술관. 어떤 전시를 하고 있을지 공연은 어떨지 기대되었다.

 시를 대표하는 곳 답게 스케일이 크고 건물의 외관 뿐 아니라 내관도 웅장했다.


왼쪽 수원시립미술관 내부, 오른쪽 건널목 너머의 건물 외관


 수원시립미술관에 대한 자료를 검색해 보니 2015년 개관할 당시의 이름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이었고 현대산업개발이 공사비를 부담해 준공을 마친 뒤 수원시에 기부한 건축물이라고 한다.


 

 현재 전시는 동시에 3개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각각의 제목은 <마당: 마주합니다 당신을>, <물은 별을 담는다>, <평범함의 비범함> 등이었다.

 요즘 작품 제작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회화 위주로 감상하려고 노력하는 면이 있어 주로 회화들을 전시한 문학적 제목의 2023 소장품 전 <물은 별을 담는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수원(水原)이라는 도시 이름이 물의 근원이라는 뜻이 있어 물의 도시 수원의 전시장을 별과 같은 소장품들이 빛낸다는 의미의 제목이었다.


 '별을 헤아리고'라는 소제목의 전시를 보던 중 예전에 알던 분의 작품이 있어 반가웠는데 이십대때 교회 공동체에서 미술 전공하는 선후배들과 어울려 함께 만나곤 했던 송은영 작가의 초현실적인 유화 작품이 그것이다. 그녀가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중견작가라는 사실을 미술관에서 인정받고 소장 작가로 선정된 사실이 존경스러웠다.

 해외 유명 작가인 줄리안 오피의 작품도 깔끔한 선과 팝아트적인 젊은 감각을 자랑하며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걸어가는 시민들의 모습을 경쾌하게 표현했고 재료가 비닐이라고 적힌 것으로 보니 물감이 아니라 시트지나 접착지같은 독특한 매체를 사용한 듯하다. 


왼쪽 줄리안 오피, 한운성, 강형구의 작품.  오른쪽 송은영의 작품.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유난히 빛났던 작품은 이윤기의 청자를 그린 유화 시리즈였는데 고려 상감 청자를 대표하는 문화재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패러디하여 자원봉사자, 쓰레기 줍는 사람, 물 주는 어머니 등을 청자의 무늬로 바꾸어 그렸다. 작품을 보며 그의 재치에 놀라 피식 웃으며 보았는데 작품 캡션에 작가가 1972년생임에도 50살도 안되는 해인 2020년에 돌아가신 것으로 적혀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재미있는 아이디어의 회화를 그리셨던 화가가 더이상 그림을 그리실 수가 없구나..


왼쪽부터 청자상감자원봉사자문 매병, 청자상감쓰레기줍는사람 매병, 청자상감물주는어머니 매병.  이윤기. 캔버스에 유채. 2008


   '성.별을 넘어서'라는 소제목의 여성주의 컬렉션 전시에서는 대학원 재학 시절 학생들에게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창작열을 한껏 고조시키신 수업으로 인기를 끌었던 조덕현 교수님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특유의 흑백 소묘 기법으로 근현대사를 사는 역사 속 여인들의 모습을 극적으로 그린 대형 회화 작품이었다. 

 당시 조덕현 교수님의 섭외 덕분에 작가의 작업실에 학생들 한 떼가 당당히 쳐들어가 신나게 인터뷰했던 기억이 생생한 윤석남 작가의 어머니에 관한 입체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진정한 예술가의 풍모와 진솔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해주셨던 윤석남 작가와의 시간이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둘 다 여성주의 작품인데 왼쪽은 윤석남 작가의 입체 작품.  오른쪽 조덕현 작가의 회화 작품.


두번째로 인상깊었던 전시는 <평범함의 비범함> 이라는 제목의 전시로 어린이들의 창의적 활동을 지원하는 단체인 듯한 NC문화재단과 협력한 일종의 교육전시였다. '안데스'라는 신기한 이름(아마도 예명이겠지?)을 가진 작가의 인터뷰 영상부터 흥미가 생겼는데 자신은 본래 하나에 오래 집중을 못하는 편이라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작가라는 직업에 잘 맞는다고 했다. 그녀의 전시 컨셉은 '지질학적 베이커리'였는데 남미 여행 중 도로를 달리는 차에서 산의 형태를 보면서 빵을 연상했던 기억에서 작업 영감을 얻었다고 한 것 같다. 온갖 종류의 빵들이 정성스럽게 진열되어 있는 모습이 아주 거대한 농담 같아 보이기도 하고 가상의 지질학 세계를 구축한 상상력의 공간 같기도 했다. 빵을 만드는 과정이나 빵의 형형색색의 형태에 지질학적 이름을 창작해 붙인 발상이 재미있었다. 암석도, 지층도, 지구본도 죄다 빵이었다.


지질학적 베이커리 전시 모습



 마지막  세번째 <마당: 마주합니다 당신을>이라는 제목의 젊은 작가들의 설치 전시는 이웃의 열린 장을 만든다는 취지의 거대한 관객 참여형 작품이 많았는데 잠시 구경했고 집중해서 보지 못했다. 요즘 나의 미술을 보는 관점이 회화 중심이라 그 외의 장르는 상대적으로 자세히 보지 않게 된 점도 있고 이 전시의 설치 작품들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에 깊이 공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예술을 매개로 이웃 간의 연대의 공간을 만든다는 발상은 매우 바람직한 컨셉이라고 생각했다.


저녁 7시가 되기 15분전에 미술관 로비에 가보니 이미 많은 관객들이 모여 있어 나도 서둘러 한 자리 잡고 앉았다. 미술관에서 준비한 1인용 매트를 깔고 계단에 앉아 연주자들 바로 앞에서 보는 공연이라~ 시작도 안했는데 뭔가모를 설렘이 느껴졌다. 빈 드럼셋과 콘트라베이스, 피아노 등을 바라보며 이번 연주에서 수원 화성과 정조대왕을 재즈와 어떤 방식으로 연결해서 풀어줄까 궁금해했다.

 공연 제목은 <찬란한 유산>이고 연주자는 솜퀄텟(Somm Quartet)이라는 4인의 재즈 그룹.

 200여년전 축조된 찬란한 유산 화성과 정조에 대한 이야기와 100년전 태동한 재즈 음악이 만나 풀어내는 음악회라는 설명이 있었다.





 7시가 되니 보컬 담당인 이다솜씨가 등장해 간단한 인사를 전한 후 저녁에 어울리는 재즈 향기 가득한 곡을 불렀다. 공연은 정조 대왕의 인생을 '그리움, 꿈과 도약, 이상, 찬란한 유산' 등 4가지 단어로 풀어내 각 단어에 어울리는 곡들을 연주하는 형태였다. 



 첫번째 '그리움' 편은  'There will never be another you'라는 곡으로 열었고 가수 이다솜씨가 포르투갈의 보사노바곡인 'Chega de saudade'라는 곡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주셨다. 번역하면 '회환이여 안녕'이라는 뜻이며 우리 나라의 한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는 해석을 해 주셨는데 다시 찾아 듣고 싶은 곡이었다. 

 '꿈과 도약' 편에서는 진취적으로 나라의 발전을 이루어간 정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밝고 희망적인 곡들을 연주했다. 어느 정도 귀에 익은 곡들이었는데 'Look for the silver lining'이라는 곡이 특히 달콤하게 다가왔다. 

 '이상' 편에는 가장 친숙한 곡들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Over the rainbow'와 ' My favorite things'라는 두 영화 음악이었다. 첫번째 곡은 그동안 숱하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수가 첫 소절을 부르는 동안 소름이 살짝 돋았다. 두번째 곡이 재즈로 편곡되는 버전은 신선하게 들렸는데 중간에 가냘픈 실루엣의 현대 안무가가 계단을 통해 깜짝 등장하여 음악과 함께 절도 있는 춤사위를 보여주어 다원 예술의 장을 만들었다. 

 마지막 '찬란한 유산' 편은 우리 나라 곡인 '아름다운 나라'를 재즈로 편곡한 한국적 음색의 연주로 마무리했다. 시민들을 위한 무료 공연이라지만 연주자들의 음악성이 뛰어나 완성도가 높은 공연이었으며 실제로 공연 중간에 드럼과 콘트라베이스, 피아노 연주자들이 각각 연주 실력을 자랑하는 시간도 가졌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일상을 벗어난 삶의 여백을 만들고 전시와 음악을 즐길 수 있어 행복한 저녁이었다. 사는 곳이든 근무하는 곳이든 잠시 머무는 곳이든 기회만 닿는다면 약간의 정보 검색이라는 수고를 통해 문화 예술에 젖어드는 예상치 못한 기쁨을 선사받을 수 있는 시대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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