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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별 Dec 02. 2023

흐린 가을 아트스페이스광교

<2023아워세트 : 레벨나인 x 손동현>

 비가 곧 내릴 것 같은 11월의 오후 광교호수공원을 걸었다.


 바람이 매서을 정도로 차가운 것은 아니었지만 흐린 하늘 아래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걸으니 코트를 입었음에도 늦가을의 스산함이 느껴졌다. 호숫가에 부는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억새밭 또한 이 계절에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호수를 옆에 두고 빙 둘러 20여 분을 걸어가니 수원 컨벤션센터로 통하는 다리 같은 통로가 나타났고 그 길로 들어서자 최정화 작가의 거대한 달팽이 조각이 관람객을 맞이하는 '아트스페이스 광교'가 보였다.



  이 곳을 처음으로 방문한 2019년에는 최정화 작가의 '잡화'전이라는 화려한 설치 미술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찾았던 2021년 여름에는 '그리고 보다'라는 회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두 전시 다 흥미롭게 보았고 회화 전시 때는 전시연계 체험도 재미나게 하고 돌아와서 미술 감상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전시 작품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2023년 가을 현재 시각 이미지 관련 자료들을 체계적이고 미적으로 정리해 관객에게  제시하는 아카이빙 그룹 레벨나인과 현대적 소재를 한국화에 도입한 흥미로운 작업을 하는 손동현 작가의 컬레버레이션 전시인 <2023 아워세트: 레벨나인x손동현> 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아카이빙에 관해서는 지식이 별로 없고 아카이브라는 단어가 자료들을 모아 정리하고 보존하여 검색하기 쉽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 정도로 알고 있다. 요즘에는 아카이빙 자체가 미술의 표현 방법 중 하나로 간주되어 가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평창동에 서울시립미술관의 분관인 '서울시립아카이브'가 생겼다고 들었는데 기록과 예술이 함께 하는 미술관이라고 소개되는 그곳에 방학때 방문해서 아카이빙의 개념을 좀더 정립해볼까 싶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손동현 작가의 현대적 한국화가 먼저 눈에 띄었는데 베트맨이나 패스트푸드 로고를 한국화에 접목시킨 그의 작품은 과거 미술 잡지 등에서 본 이미지라 친근했다. 미디어 아카이빙 그룹인 레벨나인의 컴퓨터그래픽 영상을 출력하는 거대한 구조물이 그림과 공존함으로써 한국화가의 현대적인 감성이 더욱 심화되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손동현 작가는 슈퍼 히어로들이 등장하는 SF 영화와 홍콩 액션 영화에 매료되셨던 분인지 관련된 소재와 인물들이 그림 속에 심심치 않게 등장해서 한국화에 영 관심이 없는 관객일지라도 그러한 요소를 찾아보면 심심치 않은 시간을 보내겠다 싶었다.


  이번에 작가는 동양화 이론인 '육법'을 먹선으로 그린 인물화로 시각화한 '육협' 시리즈를 그렸는데 그 방식이 흥미로웠다. '육법'이란 중국 화가 사혁이 6세기 경 '고화품록'이라는 저서를 통해 제시한 '그림을 그릴 때 꼭 있어야 할 6가지 원칙'인데 현대 한국화에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예전에 임용시험 대비 미술이론 공부할 때 동양화의 중요한 이론인 까닭으로 기운생동, 골법용필, 응물상형, 수류부채, 경영위치, 전이모사 등 여섯가지 원칙의 이름과 뜻을 달달 외웠던 기억이 난다.

 전시된  '육협' 시리즈의 한 켠에 부착된 작품 설명이다.

 중국 남북조 시대 남제의 문인 사혁이 제시한 육법을 여섯 명의 협객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문인화의 기초인 육법을 각기 고유한 무공과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인물화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육법' 중 첫번째인 기운생동은 '살아있는 대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는 의미이므로 생생하게 그려진 인물의 생기가 인물 외부로까지 뻗어나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펼쳐진 종이 부채들 위에 기운을 상징하는 먹선을 그린 뒤 날아가는 형상처럼 벽에 부착시킨 재치있는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초인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무림의 고수나 외계인같은 인물을 그린 그림들이 많았고 그들에게서 익숙한 얼굴을 찾는 잔재미가 쏠쏠했다. 호감가는 너털웃음 날리며 날렵한 몸짓으로 양손으로 권총을 겨누곤했던 영화 '영웅본색'에서의 모습이 생생한 그 배우, 주윤발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이다. 다른 벽에서는 유덕화라는 같은 시대 홍콩 영화 배우 얼굴도 찾아낼 수 있었다.


 

 

 한국화답게 전통적인 족자 형태로 액자를 대신하였는데 벽이 아닌 공중에 매달아 모빌같이 설치한 방식, 한지와 먹이라는 전통 재료와 만화같은 그림 소재의 부조화 등이 한국화가 지닐 수 있는 고루함을 날려주는 느낌이었다. 인물을 기본 소재로 하여 산수화에 등장하는 산과 폭포 등 자연물이 인물화 속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게 하거나 붓글씨를 반복해서 쓴 문양을 인물의 신체 일부에 등장시키는 등 한국화 기법으로 할 수 있는 다채로운 시도를 하고 있었다. 물감의 드리핑 기법처럼 먹물을 흐르게 하여 강인한 인상의 인물이 표출하는 힘을 표현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각 그림마다 다르게 표현된 화법을 자세히 관찰하며 화가의 필력과 한국화의 새로운 변주를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군데 군데 레벨나인 그룹이 제작한 미술관 관람객 대상 설문 프로그램, 다양한 도형들을 조합시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게임, 미술관이나 박물관과 협업하여 미술가에 대해 정리한 아카이빙 결과물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관객들은 그것들을 컴퓨터나 대형 프로젝트 화면을 통해 감상하거나 직접 조작해보는 적극적인 참여도 할 수 있었다.


  미술관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대중에게 친근한 소재를 다룬 동시대적 한국화를 감상함과 동시에 설문, 게임, 자료 검색 등의 컴퓨터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어 다양한 연령층이 흥미를 가질법한 정성 가득한 기획의 전시였다고 생각했다. 이번 달 17일까지 열리며 무료 전시이니 수원시 광교 시민 뿐 아니라 미술에 관심 있는 분들이 편하게 전시를 찾아 미적 영감을 충전들 하셨으면 한다. 현대 미술 전시를 보고난 뒤 바로 옆 광교호수공원으로 나가 도심 속 호수의 겨울 풍경을 호젓하게 즐기며 걸어보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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