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 개인전 <나의 노래> 마지막 날 작가와의 깜짝 만남
요즘 나는 창작의 영감을 얻기 위한 인풋(Input)을 기회 되는대로 늘리려는 가운데 작업에 도움된다고 생각해서 하는 몇 가지가 있다. 유튜브로 작가 인터뷰 영상('공셸TV '라는 현직 작가가 운영하시는 채널을 주로 시청함)을 보며 작가들이 던져주는 화두나 작업 태도 기록하기, 미대 재학 시절 교수님들이 권해주셨던 가스통 바슐라르의 책들 찬찬히 읽기, 보고 싶은 회화 전시 정보 뜨면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보러가기 등이다. 아무 생각없이 덜컥 캔버스에 물감 바르기부터 시작해 주제도 모호하고 일관성 없는 작업들을 해왔던 과거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붓을 드는 일은 잠시 미루고 먼저 창작에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앞서 밝힌 유튜브 채널의 주인장께서 인터뷰했던 작가들 개인전 소식까지 친절하게 공지하신 덕분에 오늘이 '이내'라는 작가의 개인전 마지막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전시는 잠실 석촌호수 옆 '갤러리 이든'에서 하고 있었고 이 곳은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여 키우는 일을 목표로 하여 젊은 관장이 설립한지 얼마 안 된 곳이라는데 2호선 잠실역에서 석촌 호수를 가로질러 15분 가량 걸어간 위치에 있었다. 이내 작가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서 작품을 대하는 진정성 있는 태도와 작품에 담긴 뚜렷한 철학이 인상 깊었던지라 개인전에서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대되었다.
12월이니 연말 기분을 낸다고 롯데월드 타워와 백화점, 석촌 호수 일대는 화려한 조명이 행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고 있었다.
지하에 있는 갤러리라 어떤 공간일까 궁금했는데 계단을 내려가 전시장에 들어가니 천장이 높고 입구 부분에는 넓은 통유리를 설치하여 공간이 쾌적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갤러리 관장님 또는 큐레이터님이실 여성분께서 오시더니 따뜻한 차를 권하시며 관객을 환대하는 태도가 다른 갤러리와 사뭇 다르다 싶었다. 가장 큰 환대는 작가가 관객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작품 설명을 해 주시겠다고 제안한 일이었다. 그 전에 떡도 한 개 건네 주셨는데 전시 마지막날이라고 부모님께서 축하의 의미로 보내주신 떡이라고 하셨다.
단아한 인상의 이내 작가님은 자신의 전시를 보러 일부러 시간 내서 오시는 관객 한 분 한 분이 소중해서 토요일이면 꼭 양주의 작업실에서 이곳 잠실로 작품 설명을 하러 오신다고 했다. 함께 전시장을 돌며 작가가 해주시는 자세한 설명을 들으니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성실하고 진정성있는 작가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어 '참 좋은 작가시구나, 이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의 시리즈는 크게 세 가지로 '기억, 시선, 경배' 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데 각각 작가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의미한다.
기억 시리즈는 캔버스 화면 위에 금색의 작은 동그라미를 빽빽하게 그린 뒤 동그라미마다 색을 채우며 희미한 풍경이 서서히 나타나도록 만드는 작업이다. 그 풍경들이란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즐거운 추억을 만든 여행지이거나 주말에 텔레비전에서 본 영화 속 멋진 장소들이다. 작가는 놀랍게도 자신의 뇌리에 강하게 박힌 이미지를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재능이 있어 각 그림 속 풍경들을 사진을 참고하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서 그리셨다고 한다. 작은 점들로 이루어진 풍경이 처음에는 흐릿해서 안 보였지만 뒤로 나가 보면 볼수록 선명해졌으며 전체적으로 몽환적 분위기가 있어 아련한 과거의 추억과 잘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기억 시리즈의 경우 처음에 콩알만한 금색 동그라미로 전면을 채우는 일부터 노동집약적인데 각 점을 다른 색으로 채워 나가면서 색의 관계를 예민하게 살펴야 하니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한다. 작업 과정의 특성상 100호 정도의 작품 하나를 끝내는데 4개월 정도가 걸린다고 하며 작가가 쏟은 노력과 쌓여진 시간 자체가 작품의 재료라고 할 수 있다. 기억 시리즈 작품들은 볼 때마다 미묘하게 달라지는 색상으로 인해 신비로운 감정을 느끼게 했는데 특히 <기억-은혜의 빛>이라는 100호 작품에 그려진 일출 장면은 나의 시선을 오래 끌어 당겼다. 일출이 주는 감동은 언제든 무심하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이며 당시 작가가 보았던 그 빛은 어땠을까 궁금했다.
시선 시리즈는 작가가 살면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 자신이 던지는 시선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림들이며 현재의 이야기다. 어떠한 작품은 모노톤 화면인데 수많은 눈을 그린 이미지들이 부조처럼 돌출되어 있었고 다른 작품은 금색 테두리 속에 각양각색의 색상들이 칠해져 있었다. 결국 시선들의 망은 얽히고 설켜 사회를 이룬다는 의미를 담아 그토록 많은 눈들을 연결시켜 그리셨다.
경배 시리즈는 작가의 궁극적인 바람과 미래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일기처럼 그린 추상화로 개성이 돋보였다. 자신의 신앙 고백이자 인간이 경배하는 자세를 의미하는 S자 형태의 인간, 파도의 움직임을 단순화시킨 두툼한 일필휘지의 붓터치, 사용하는 색의 혼합 비율을 정확하게 맞춰 시리즈 전체의 색을 통일하는 등 자신만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율동감 있는 붓터치로 표현해서인지 그림 속 시련은 암울하고 공포스럽기보다 인생의 과정으로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시리즈의 설명을 들으면서 공감한 부분이 은색, 금색으로 눈에 띄게 그린 붓터치는 외부에서 오는 시련을, 릴리프적 입체감은 있지만 배경과 같은 색이라 눈에 안 띄는 붓터치는 내면에서 만들어내는 시련을 나타낸다는 대목이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외부에서 닥쳐온 시련이 나를 힘들게 할 때 내 마음이 이를 심화, 증폭시켜 스스로를 더 괴롭힐 때가 많았던 게 생각났다. 나의 지난 날의 몇 페이지를 어렴풋이 떠올리며 깊이 공감했던 것 같다. 경배하는 인간이 내외부 시련의 사이에 위치하여 의연하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은 그것을 이겨내는 희망을 상징한다. 시련과 인간의 극복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운 인생은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작가가 신을 향한 경외심, 흔들림 없는 믿음을 그림을 통해 표현했다는 점 또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내 작가는 인스타그램으로 자신의 작업 과정, 신작, 전시 등에 관한 소통을 활발히 하신다는데 그 덕인지 해외에서 작품을 좋게 보고 연락주는 분들이 더 많다고 하셨다. 얼마전 10월에는 런던의 사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하게 되어 갔다 오셨고 내년에는 파리의 한 갤러리에서 초청을 받아 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작가가 런던 개인전때문에 유럽을 갔을 때 했다는 풍경 스케치도 좋았는데 제일 위의 목탄으로 그린듯한 스케치는 5분, 두세번째 줄의 수채 스케치는 각각 10분씩 시간 제한을 두고 집중해서 그린 것이라고 했다. 스케치 작품으로서의 완성도, 붓터치, 세부 묘사가 모두 뛰어나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나도 틈틈이 스케치와 크로키를 하고 있는데 이내 작가의 속도를 절대 못 따라갈 듯 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작품 완성도와 속도 모두 다 잡아야 겠다는 남모를 결심을 했다. 두번째 줄 오른쪽의 스케치도 재미있었는데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날이 추워 시민들이 각기 다른 방한복, 모자 등을 착용한 모습을 관찰하고 그린 뒤 한 화면에 모았다고 했다. 여행을 가게 되면 그 곳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해 이런 귀여운 일러스트레이션을 만들어보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졌다.
서양 미술사에서는 중세 이콘화, 19세기말 ~20세기초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등의 작품에서 금색이 사용되는데 중세 시대에는 내세에 대한 상징을 위해 인물의 배경을 금색으로 칠했고, 클림트의 경우 황금 세공업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영향으로 작품에 금색을 도입했다는 사실을 책에서 본적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내 작가가 금색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작가는 금색이 가진 특성이 이중적이라는 점 때문에 자신을 표현하기 적합한 색이라고 하셨다. 금색이 가진 풍요, 안정 등의 긍정적 이미지와 그에 반해 탐욕, 타락과 같은 부정적 이미지처럼 자신의 내면의 이중적인 면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전시를 보며 금색이 작가 자체를 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보지 못했는데 작가가 사용하는 주요 색이 정체성을 의미하는 자전적 이야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참신하게 다가왔다. 물론 모든 미술가의 작품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고 광범위한 의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창작에 대한 영감을 얻고 싶어 토요일 오후에 나섰던 전시 투어에서 어떤 날보다 특별한 선물을 작가로부터 받았다. 나보다 많이 젊지만 작업의 스타일과 철학을 확고히 세운 이내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가 작업과 전시를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하는지 느끼고 그 기운을 얻어올 수 있었다. 평소에는 타인과 말하는 것보다는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편할 정도로 말수가 적다는데 자신의 작품을 설명할 때의 작가의 열정적인 자세와 자신감 있는 어조는 작품에 대한 사랑과 환희를 온 몸으로 드러냈다.
어린 시절에 그림 그리는 게 너무 좋았고 '화가'라는 말을 알게 된 후부터 쭉 화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나. 하지만 대학원 졸업 후 벼랑 끝에 선 전업 화가의 삶을 살까봐 두려워 작업실을 관두고 일을 선택한 나.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상황에 교사 시험을 치루고 버벅대며 일과 육아를 하다보니 훌쩍 지나가버린 시간들.
아직 작업 스타일과 철학은 세우지 못했는데 나이는 버겁도록 많아졌다는 생각에 다시 창작자의 삶을 살 수 있을까 불안할 때가 많은데...
나이보다 자신감보다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그것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일에 대한 기쁨을 잃지 않는 것.
자신의 작품과도 같이 우아한 이내 작가가 힘든 작업 노동의 시간을 기꺼이 쌓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인 그리는 기쁨! 그것을 회복하는 일이 지금 나에게 필요하다는 영감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