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 년 전 내가 살던 동네는 송파구의 방이동이다.
5호선 지하철로 한 정거장만 가면 되는 가까운 오금동에 사는 친구네 집 바로 옆에 공원이 조성되었다는 소식에 그 친구와 잠실동 사는 친구, 나 이렇게 고등학교 동창 셋이서 새로 생긴 오금 공원에 놀러 간 기억이 난다.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넓은 부지에 키 큰 나무가 많아서 푸르르고 쾌적한 공원이라는 인상이었다.
대학원에 다닐 적에 아파트의 앞 집 할머니께서 초등학생인 손자, 손녀의 미술과 수학 과외를 부탁하셔서 이틀은 수학 문제집을 같이 풀고 하루는 미술 수업을 했는데 그 아이들과 봄꽃이 만발한 계절에 오금 공원을 찾아갔다. 진달래와 개나리가 가득 피어 있는 공원에서 아이들이 수채 도구로 풍경화 그리는 것을 조금씩 도와주고 공원의 꽃을 배경으로 각각 독사진도 찍어 주었는데 노란 개나리, 분홍 진달래의 화사한 색감과 수줍어하던 아이의 표정이 함께 담긴 풋풋한 사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두 아이들은 보기 드물게 차분하고 순한 아이들이었다.
사방이 아파트 단지로 가득한 오금역 주변에 공원이 생겼을 때 그 일대 주민들은 녹지를 즐길 수 있게 되어 좋았을 것 같다. 나도 현재 경기도의 녹지가 풍부한 곳에 살고 있어 녹지에 대한 아쉬움이 없다 보니 굳이 거리가 먼 이곳 오금공원을 찾아갈 일이 생기지 않았다.
이번에 아버지의 오금 공원 그림을 오마주 하는 작업을 하기 전 오금 공원을 한 번 답사해야겠다 생각을 했는데 일부러 찾아가는 게 번거로운 일이어서 미루고 미루다 작년 여름 방학의 마지막 날 부모님 뵈러 간 김에 짧게 답사하고 촬영을 했다. 처음에는 내가 다른 곳을 찾아온 줄 알았을 정도로 처음 조성되었을 때의 모습과 달리 나무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어서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인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공원으로 들어가자마자 산 중턱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인공 폭포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럴듯한 인공 폭포가 생겼고 폭포 위쪽에는 잘 지어진 정자가 있었다. 폭포에 물이 내려오는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빈 돌무더기만 보였고 그 위에 있는 정자가 어떤지 궁금해서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 굽어진 산길을 돌아가니 전통적인 한옥 형태의 정자가 있었는데 비슷하게 흉내만 내서 만든 어설픈 건물이 아니었고 기와, 기둥, 단청 등의 전통 건축 요소들 하나하나가 정교하고 튼튼해 보였다. 정자에서 볼 수 있는 경치는 사방에 가득한 풀과 나무, 멀리 보이는 아파트, 인공 폭포의 물이 멈춰 있어 잔잔하게 고여 있는 것이 마치 호수같이 보이는 모습 등이었는데 전체적인 조합이 멋이 있었다. 깊은 숲 속의 한옥 정자에 앉아 폭포를 내려다보며 물소리까지 듣는다면 선비처럼 풍류를 즐기는 분위기를 한껏 낼 수 있을 것 같았다..계단을 올라와서 더 안쪽으로 들어와야 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인적이 드물었고 주위는 새소리 뿐 고요했다. 하루종일 온갖 생활 소음과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사는 우리에게 고요한 순간이 참 값지다고 여겨진다.
오금 공원에서 발견했던 정자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인 숲의 사진들을 촬영하고 집으로 돌아와 이 소재들을 가지고 어떤 장면을 그릴까 궁리하다가 처음에는 무성한 숲을 위주로 표현하려고 나무와 풀을 조금씩 그려 나갔다. 식물 형태를 그린 내 그림을 보다가 오금 공원 답사를 갔을 때 폭포 위 정자에서 공원 주위의 경치를 보며 숲 속의 고요를 누린 편안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당시의 느낌을 먼저 스케치로 그려본 뒤 그것을 재현하여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표현했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이 고요함에 잠겨 평안함을 느끼는 시간을 잠시라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