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서 여러 해 전에 동유럽 여행을 다녀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당시 아이들 키우며 하루하루 여유없이 사는 워킹맘이었던 나는 두 분이 즐거우셨겠구나 생각을 잠깐 하고는 동유럽의 어느 나라들을 다녀왔는지 자세히 여쭤 보지도 못했다. 여행 다녀오신 직후 아버지께서 한동안 앓아누우셨기 때문에 부모님의 동유럽 여행 일정이 노인들이 소화하기엔 좀 힘드셨나 생각하며 염려했고 그 후 동유럽에 대한 일은 잊고 있었다. 이번에 아버지의 수채화 작품들을 정리하면서 동유럽 여행에서 보고 오신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에 있는 성당을 그리신 그림을 발견했는데 슬로베니아라는 나라는 그전까지 거의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곳이었다.
동유럽을 가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이 성당의 정체를 파악부터 해야겠다 싶어 검색을 해 보니 이름은 마리아 승천 성당이었고 블레드 호수 한가운데 있는 섬에 위치했기 때문에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며 주변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슬로베니아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라는 사실을 알았다. 믿기 어렵게도 아주 옛날인 6세기 무렵 슬라브인들이 지은 건물을 8세기부터 성당으로 사용했다는 정보가 있었고 99개의 돌계단이 있어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이 계단을 지나 성당의 종을 울리면 행복해진다는 전설이 전해져 결혼식 장소로도 사랑받는 곳이라 한다.
마리아 승천 성당의 슬로베니아 이름을 찾아보니 'Cerkev Marijinega Vnebovzetja'였는데 영어 알파벳을 사용하지만 읽을 때 발음을 하기가 어려운 말이라 슬로베니아라는 나라가 생소한 만큼이나 언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동시에 미지의 무언가를 대하는 신비로운 느낌도 있었기 때문에 이 슬로베니아식 성당 이름을 나의 그림 속에 넣기로 했다.
알프스산을 배경으로 마리아 승천 성당을 다양한 계절과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을 찾아보니 눈 덮인 알프스산과 눈꽃이 가득한 침엽수에 둘러싸인 겨울의 성당이 나의 눈에는 가장 아름답게 보였고, 마침 아버지께서도 겨울의 성당 모습을 그리셨다. 겨울밤 소리 없이 탐스러운 눈이 내리고 어제 내렸던 눈이 가득 쌓여 하얗고 포근한 형체를 이루는 나무들에 둘러싸인 고풍스러운 성당을 바라본다면 동유럽의 정취를 가득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에 그리다 보니 내가 상상한 장면이 성탄절에 여러 사람들과 주고받던 카드에 그려진 풍경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뭐든 그리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성탄절이 다가오면 나는 직접 만든 카드를 친구들에게 뿌릴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해마다 다른 디자인을 구상해 성탄절 카드를 만들었고 그때마다 사용하는 기법을 바꾸곤 했다. 지금 기억나는 기법은 빨강, 초록의 띠가 번갈아 있는 리본 끈을 찾아내서 나비 리본을 만들어 부착한 입체 기법, 작은 붓으로 꼬불꼬불한 선을 그린 스케치 기법, 검은 종이에 금색이나 은색 펜을 사용한 기법 등이 있다. 가족들과 학교 친구들, 교회 친구들에게 카드를 써서 건네주는 즐거움 이전에 나만의 방식으로 성탄 카드를 만드는 행복한 과정이 있었다.
아버지의 그림 중 유럽의 겨울을 표현한 작품 두 점은 각각 슬로베니아와 핀란드를 그린 그림인데 나의 경우 두 그림을 하나의 시리즈로 생각하고 겨울, 성탄, 슬로베니아 등의 키워드에서 내 그림 소재를 찾아보았다. 마리아 승천 성당의 이름을 찾을 때 슬로베니아 언어가 가진 신비로움, 참신함을 느꼈기 때문에 마리아 승천 성당을 그린 그림 속에 슬로베니아어를 붓으로 적었다. 동유럽의 보석같은 성당이라는 의미를 표현하고자 내리는 눈들을 보석 형상으로 바꾸었다. 이 그림에서 사용했던 남보라빛 색상을 사용하여 그린 다른 겨울 그림 속에는 아예 슬로베니아 언어로 된 성탄 인사를 크게 적었다. 역시 보석 눈이 내리는 눈 밭 허공에 쓰인 이 글자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성탄 축하해요! 한국의 친구로부터'라는 말이다.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연례행사로 정성 들여 나만의 카드를 만들고 그것을 나누어주는 기쁨이 다른 무엇보다 컸던 나였기에 슬로베니아라는 잘 알지 못하는 나라에 사시는 분들께 나의 성탄 카드로 먼저 인사를 건네고 싶은 마음을 그림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