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얼어 붙은 겨울 잠실에 있는 석촌 호수를 다시 찾았다.
빈센트 발이라는 재기 넘치는 영화 감독 겸 그림자 미술을 하는 작가의 전시를 보러 잠실역 소피텔 건물에 있는 갤러리 209를 찾아 갔다.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 '널 위한 문화 예술'에서 99티켓이라는 할인 티켓을 팔길래 오래전에 구입해 놓고 잊고 있다가 관람 가능한 마지막 날짜에 부랴부랴 가게 되었다.
12월부터 북극 바람이 내려와 만들어낸 한파로 인해 무척 추웠던 겨울 방학이라 난방이 잘 나오는 집에 눌러앉아 온 몸의 세포가 느슨해지고 뇌세포까지 이완된 나는 전시 관람이고 뭐고 나가는 일은 귀찮았는데 역시나 티켓 마감 날짜가 외출하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외출 차비를 하고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 잠실역에 도착했다. 초등학교 때 잠실로 이사왔고 중고등학교 시절은 주로 잠실역 주변에서 보냈는데 결혼하고 경기도에서 산 뒤로 잠실역에 가볼 일이 별로 없었다. 내가 살던 당시 서울의 핫한 장소였던 롯데월드 어드벤쳐와 백화점은 여전히 잘 있었지만 옆에 새로 생긴 롯데타워와 롯데몰의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지은지 30년 가까이 된 건물이 다소 낡고 소박해 보였다.
잠실역 주변의 소피텔 건물을 찾아 갤러리 209에서 빈센트 발의 장난기 가득한 그림자 미술과 영상 전시를 즐거워하면서 보았다(혼자 전시를 보다보니 이야기할 친구가 없어 허전했지만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자유롭게 촬영이 가능하고 학생들이 좋아할 것 같은 작품들이 많아 수업 시간에 보여 주려고 참고 사진들을 많이 찍어 왔다. 포토존에서 혼자 셀카도 찍으려다 어린이 관람객들과 한참 줄을 서야해서 참았다.
전시를 관람한 다음에 해야 하는 나만의 미션이 있었는데 석촌 호수에서 아버지께서 그리신 수채화의 것과 같은 구도를 찾아 사진을 찍고 나의 그림은 어떤 식으로 구상해서 그려야 할지 계획하는 일이었다.
롯데 월드 어드벤쳐의 일부인 매직 아일랜드는 석촌 호수 위에 지어진 인공섬으로서 놀이공원 특유의 알록달록함과 유러피언 감성과 살짝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요리조리 버무려진 곳이다.
유럽의 성들과 고택들을 어설프게 모방해서 만든 구조물과 인공 자연물들이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자세히 보면 흉내만 낸 모조품 같아서 시시해 보이기도 하다. 아무튼 나도 십대때는 이곳이 꿈과 환상의 세상 같아 좋아했고 요즘 내가 가르치는 중고등 학생들은 롯데 월드 어드벤쳐 가는 일을 로망처럼 생각해서 시험끝나는 날이나 방학 때면 잘 입지도 않던 교복들 챙겨 입고 우르르 몰려 가곤 한다.
겨울 추위가 매서워서 패딩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털 달린 모자를 단단히 쓴 다음 석촌 호수 주변을 돌면서 내가 찾고 싶은 구도를 찾아 걸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작은 섬에 조성한 놀이공원인 매직 아일랜드라는 곳이 알록달록 토핑이 올라간 빙수나 화려한 사탕 부케같이 보이기도 한 재미있는 조형물이었다. 한파로 세상이 얼어 붙어 석촌 호수 표면도 살벌한 얼음판이 되었는데 그 위에 살짝 얹혀진 자그마한 섬에는 놀이 기구의 흥겨운 음악,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오르락 내리락하고 빙빙 돌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어 장난감 세상같았다. 시각적으로 꿈과 환상을 제공하는 놀이 공원의 속성과 잘 맞았고 일상의 고단함과 지루함을 잊고 빠져들고 싶은 초현실적인 세상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슈반슈타인성을 모방한 성이 중심에 높이 서있어 삼각형의 구도를 만드는 매직 아일랜드를 물끄러미 보다가 보로부두르 사원의 모습이 연상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네시아 1년반 체류 시절 초반에 부모님과 족자카르타 여행을 가서 새벽에 방문했던 유명한 불교 사원인데 전체적으로 만다라같은 둥근 몸체이고 꼭대기에 돔 형상의 스투파가 자리 잡아 완만한 곡선적을 그리면서도 삼각형 구도를 보여 준다. 동 트기 전 이른 새벽에 택시를 타고 숲을 지난 뒤 캄캄한 언덕길을 걸어올라 도달했던 이 사원에서 해를 맞이했던 순간은 청신한 새벽 공기의 감각과 함께 신비로운 추억으로 나에게 남아 있다. 곡선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모든 구조물이 검은색에 가까운 돌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 우리 나라의 절의 모습과 판이하게 달라서 신선했으며 정상에서 조망하는 풍경들이 야자수 빼곡한 열대 숲이어서 이국적이고 참신한 분위기였다. 9세기에 세워진 보로부두르 사원의 강렬한 첫 인상과 돌로 된 조형물에서 볼 수 있었던 상징성과 아름다움을 감상한 시간들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이 곳을 매직 아일랜드의 형태와 결합시켜보면 어떤 느낌일까 싶었다.
매직 아일랜드 중앙의 노인슈반슈타인성 모양의 구조물 대신 보로부두르 사원의 스투파 형태를 넣었고 하단에는 놀이 공원의 모습을 그대로 담았는데 롯데월드 어드벤처의 상징과도 같은 기구는 원래 실내에 있지만 하늘에 띄웠다. 아이들이 어릴 때 처음으로 롯데월드 어드벤처에 데리고 간 날 아가였던 둘째가 이 기구를 너무 좋아해서 여러 번 탔다. 놀이 공원 안에 기왕 인도네시아의 사원을 그렸으니 인도네시아의 현대적인 요소도 넣어볼까 싶은 생각으로 내가 지냈던 도시인 수도 자카르타의 풍경을 왼쪽 건물 위에 그렸다. 자카르타 살 적에 영어 학원 갈 때 과외하러 갈 때 교회 갈 때 차를 타고 다니면서 숱하게 보았던 만년필 모양의 랜드마크가 뇌리에 남아 있는데 이름이 기억 안나서 검색해보니 베쩨아(BCA) 빌딩이라고 한다. 뾰족한 만년필 촉이 하늘을 향해 서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너무 추웠던 겨울 오랜만에 석촌 호수 답사를 가서 얻었던 수확은 독특한 인공섬과 결합시킬만한 소재를 찾았다는 사실이었고 최근에 녹색 모노톤의 초현실화 작품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