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에 느끼는 것
[7월 19일의 블로그] 1.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의 '시간'은 보통 연 단위 같다. 나의 취향이나 재능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한 괴로움이 감흥 없어지게 되는 것이 그렇다. 내 맘껏 살게 된 지 10년이 좀 넘었다. 작은 세상에서 살던 나는 취향이랄 게 없고, 욕망이랄 것도 없었고 남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탐식하며 감각해 나갔다. 내 재능이나 적성이 무엇인지 몰랐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잘 몰라서, 내게 속아서 좋게 봐준 것 아닌지 의심했다.
2. 삼십이 되니, 취미와 재능 등등이 자연 발생하거나 발견된다. 돈을 주는 일이 아닌데도 자꾸 찾게 되는 것이 내 취미다. 같이 있으면 편안해지고 한참 안 보면 보고 싶고 걱정돼 연락하게 되는 사람이 내 취향이다. 내가 직접 경험해 온 여러 일들에 비해 쉽게 해내는 것들이 내 재능이다. 따박따박 받던 월급을 끊어내면서 공부하러 왔고, 그 공부가 재미있다. 모르는 것을 들여다보며 오래 앉아서 이해하는 것이 즐겁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은 내 재능이다, 그 재능이 얼마만큼의 화폐가치가 있는지 알 수 없더라도.
3. 지난해 여름에는 서울에서 폭우로 사람이 죽었는데, 올여름에는 오송에서 지하차도가 빠르게 잠기며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들이 많이 죽은 사고를 보면 몇날며칠 마음이 아프고 좋지 않다. 평소에도 좀 불안하게 뒤뚱대는 마을버스 관악 02를 타다가도 가슴이 선득해지고, 웃고 떠들면서 잘 지내다가도 너무 즐겁게 지내는 것이 미안해져 착잡해진다.
4. 이제 나보다 어린 친구들도 많이 죽는다. 수색하던 해병대원도 한 명 실종되었는데, 20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주위에 96,97년생만 봐도 아가 같은데, 얼마나 어린 친구였을까. 서울의 초등학교 저연차 선생님이 교실에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보면서도 나보다 한참 어릴 거 같은 친구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 안쓰러웠다.
5. 죽음은 너무도 개별적이고 개인의 슬픔은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적확히 이해할 수 없어서 어떻게 말을 얹을 자격은 없지만. 그냥 나도,,, '이럴 거면 왜 살지' 하며 살고 싶지 않던 순간이 있었는데 삶은 계속되었고. 삶과 죽음이 정말 한 끗 차이라서, 어떤 사람은 어쩌다 보니 죽지 못해 살지만 어떤 사람은 인사할 겨를도 없이 불가항력으로 죽는다. 그런데 만약 아주 조금의 차이로 살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다 싶어서. 아득하게 괴로운 시간이 끝이 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나고 보니 한정된 길이의 터널이어서 끝나면 좋은 순간이 오기도 하니까. 그래도 죽은 이들은 평안한 세상을 찾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