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한파에 평양냉면을 먹으며
북극한파의 영향으로 영하 십몇도로 아침을 시작한 아주 추운 날. 오전부터 꽁꽁 싸매고 편도 1시간쯤 걸리는 시청을 향해 출발했다. 오랜만에 광화문까지 먼 걸음을 한 김에 교보문고도 들르고 싶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하고 있다는 장욱진전도 보고 싶고, 드립커피가 맛나다는 카페 벌새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오후 3시에 있는 코딩 스터디를 하러 다시 학교로 돌아와야 했다.
2시간 약속을 위해 2시간 전철과 버스를 타는 조금 무리한 일정이었다. 스터디 과제까지 끝내지 않고 출발한 터라, 마음 한구석이 조금 급했지만, 평소와 달리 버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좋아하는 선배를 만나 평양냉면을 먹기로 한 날이기 때문에! 이 선배는 2022년 브런치를 열고 처음 올린 글에 나오는 평양냉면을 사준 선배다. 회사를 휴직하고 1년 반이 넘게 안부 인사 한 번 안 한 괘씸한 후배에게 먼저 잘 지내느냐며, 한번 구도심에 놀러 오라며 메시지를 주셨는데, 이 메뉴 저 메뉴 고민해 보다가 회사 선배들에게 배웠고, 선배들과 자주 먹은 평양냉면을 먹기로 했다.
선배와는 1년 간 일하며 배웠고, 마지막으로 함께 부서에 있던 것이 2020년 6월이니까 벌써 3년 반이 넘었다. 그 3년 반의 절반을 연락도 하지 않은 셈이다. 그래서 엊그제 산책하면서는, 선배를 만나면 근황(近況)이란 말을 쓰기도 어려운 긴 공백 동안 내가 경험한 것, 내가 깨달은 것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할까 생각했다. 곰곰이 선배에게 해드릴 이야기를 고르다 보니 갑자기 울음이 터지는 작은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한겨울이라 자리가 텅 빈 을밀대 무교점에 먼저 와계신 선배를 보자마자, 공백을 뛰어넘기 위한 모든 준비가 필요 없었구나, 깨달았다. 먼저 늘 그랬던 것처럼 제육과 전을 시켜놓고 차가운 소주를 마셨다. 셋이서 세 병째 시키고서야 냉면을 주문해 먹었다. 선주후면이다. 그 사이 함께 부서에 있던 두 선배에게 대학원에 와서 깨달은 회사가 괴로웠던 이유, 지금의 생활은 어떤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 두서없이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여러 어른들이 그러하듯 내 이야기를 한심하게 생각하실까 걱정되거나, 나의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하실 거라는 한 치의 의심도 들지 않았다. 수영을 배운 지 아무리 오래되어도 물에 들어가면 익숙하게 물살을 가르게 되는 것처럼 잠깐의 시절인연이었을지라도 내가 좋아했던 사람을 마주하면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한 이유에 대해 순식간에 떠올리게 되고 그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한 선배들은 그런 어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사로 돌아가는 선배들을 따라 회사 로비 카페에서 커피까지 한 잔 얻어먹고서야 아쉽게 발길을 뗐다. 약간 취한 상태로 따뜻한 라테를 홀짝이며 덕수궁 주위를 걸어 시청역으로 직행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고, 익숙한 방식으로 충분히 즐겁고 행복했다.
지난해 이미 오래전 매듭을 짓고 뚫고 지나왔다고 생각한 두려움이 어느 순간 과거와 같은 형태로 튀어나와 절망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불행과 고통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되살아나는 강한 관성이 있구나, 슬퍼졌다. 그런데 오늘 확인한 것처럼 행복과 기쁨도 그에 못지않게 쉽게 사라지거나 끊기지 않는 길이 난다. 좋아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면 그때처럼 쉽게 행복해지고, 내가 사랑했던 공간에 가면 다시 그때처럼 평안해지는 방법을 기억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실이 예정되어 있더라도 자신의 사랑을 아까워 말아야 한다. 내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전거 페달을 밟고 영법을 익히는 것처럼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더 힘껏 좋아하고 힘껏 잘해주며 몸과 마음에 행복을 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