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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가의 토토 Sep 06. 2024

아낌없이 주는 나무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

나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라서 제대로 된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

남들보다 일찍 가난이라는 무서운 놈을 알아버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정말 친했던 단짝 친구가 있었다.

학교 끝나면 항상 같이 놀았는데 오후 3시인가 4시쯤만 되면 피아노 학원을 가야 한다고 꼭 재미있게 놀다가 맥을 끊고 가버렸다. 하루는 그 친구가 자기 피아노 학원에 따라가자고 제안했다. 어차피 수업은 한 시간 남짓이니까 연습할 때 옆에서 기다리다가 연습 끝나고 더 놀자는 거였다.

친구와 함께 들어간 피아노 학원에서는 낯선 기분 좋은 향이 은은하게 퍼졌고, 이 방 저 방에서 피아노를 서툴게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모든 소음과 냄새가 너무 황홀했다. 행복했다.

친구가 물었다. “너는 왜 피아노 학원을 안 다녀?”  그때 나도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싶은 마음에 학원비까지 알아봤다. 그때 당시 월 3만 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부터 엄마를 매일 졸랐다.

엄마는 절대로 “안된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

엄마의 완곡한 거절은 “후재~~”였다.

실제로 엄마 자신도 어떠한 미래에는 자식이 원하는 걸 다 해주고 싶으셨을지도.

자식이 그렇게 하고 싶다는 거 해주고 싶으셨는데 돈이 없으니까 “후재~, 후재~” 만 말씀하셨다.

언제일지 기약 없는 미래.

나는 확실한 날짜를, 아니 당장 내 손을 붙잡고 피아노 학원을 데려가서 등록해 주길 바랐지만, 나에게 돌아온 답은 오빠의 손찌검이었다.

그때 당시 오빠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나를 엄청 예뻐했었다. 여덟 살 차이 나는 오빠였는데 심지어 잘 때도 나랑 같이 잘 정도로 이뻐했는데 그날은 달랐다.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오빠가 갑자기 나타나서 내 팔을 거세게 때렸다. 아픔보다는 배신감과 수치심 같은 기분 때문에 목놓아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보니 팔에 오빠의 손가락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세게 때리기도 했나 보다.

반지하도 아닌 진짜 지하에 쥐가 다니던 집에서 다섯 명의 자식이 우글우글.. 끝이 보이지 않던 가난했던 시절에 무능한 남편을 위해 죽으나 사나 큰 다라를 머리에 이고 장사를 다니던 엄마를 , 오빠는 그 고생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나 보다. 절대로 학원을 다닐 형편이 아닌데 내가 몇 날 며칠을 엄마를 괴롭히니까 오빠가 화가 너무 났나 보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40년이  다 돼가는 일인데 나는 그 장소 그 상황이 너무 선명한데 나중에 오빠한테 말하니까 전혀 기억이 없다더라.

원래 때린 놈은 다리 펴고 못 잔다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다.

그 일 이후 난 현실을 자각하고 엄마한테 돈에 관련된 얘기는 아예 안 했다.

심지어 준비물 사달라는 말도 거의 안 했던 것 같다.

그때 당시 얇은 도화지는 20원 두꺼운 도화지는 30원이었던 것 같은데 끽해야 도화지 살 돈만 타 가지고 가고 물감이나 크레파스는 언니들이 쓰던 거 물려받았다. 물감은 열두 가지 스물네 가지 심지어 36가지까지 가져오는 애들도 있었는데, 나는 열두 가지 색깔 중에서도 몇 개가 빠진 색깔 물감을 , 크레파스도 닳거나 부러진 것을 들고 다녔다.

나 스스로도 초라하게 느껴졌고, 다른 급우들에게도 초라해 보였겠지.

나는 점점 소심해졌고, 자신감도 없고, 당연히 공부도 그저 그랬다.



내가 그런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우리 애들에겐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부모로부터 받은 것도 없는 내가 쉽게 큰 돈을 벌 수 없었다. 애들에게 가난을 겪게 했다. 그 불편하고 초라한 감정을 느끼게 해 버렸다.

그러다가 최근 몇 년 사이에 형편이 많이 좋아져서 이제는 애들이 먹고 싶다는 거 갖고 싶다는 거 다 해 줄 수 있다. 내 나름에는 섭섭지 않게 챙겨준 것 같은데, 오늘 애들이랑 말하는 중에 애들이 엄마 아빠에게 서운하단다. 받은 게 없단다. 난 엄마에게 느낀 결핍을 다 채워주고 싶어서 매 순간 나를 버리고 애들에게 최선을 다했는데, 애들이 ‘선물’을 받은 적이 없단다. 그게 무슨 말인가 물어보니 엄마 아빠는 선물을 줄 때 ‘서프라이즈’를 해준 적이 없고, 항상 기념해야하는 날을 지나서 줬단다. 그래서 제대로 된 ’ 선물‘을 받은 기억이 없단다. 두 딸들이 굉장히 억울한 톤으로 말을 해서 나도 같이 억울했는데, 생각해 보니 틀린 말도 아니다. 선물이라 해봐야 기껏해야 생일 선물이나 크리스마스 선물이 전부였는데 아쉽게도 꼭 제 날이 지나서 준 것 같다.

그나마 애들이 더 어릴 때는 돈이 쪼달려서 말이 선물이지, ‘결국 무엇이 더 실용적일 것인가?‘의 기준으로 선물을 구입했고, 애들이 원하는 것을 사준다고 고르라고 해놓고 나와 남편은 뒤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때로는 더 오래 쓸 수 있는, 때로는 더 싼 것을) 사도록 조종했다.


애들이 어느 정도 크니까 그간 자신들이 쌓아왔던 서운한 감정을 쏟아부었고, 나는 그게 너무 서운하게만 느껴져서 그만 이성을 잃고 애들 앞에서 감정적으로 대처했다. 부끄럽게 처신했다.

하지만 그때 내가 애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음속 깊은 메시지는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거였다.

애들 입장에서는 서운한 일들이 있을 테지만, 나는 매 순간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줬고, 애들이 느끼기엔 다른 친구들이나 주변에 비해 부족한 부모였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자식이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받을 권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 말을 애들 앞에서 이성적으로 말해주지 못해 아쉽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가난했던 부모를 원망했던 내 안의 나에게도 그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 “

내가 부모로부터 받았던 그 모든 것들, 때론 그게 ‘결핍’이었을지라도 그것마저도 다 감사하게 생각해야겠다.

가난한 형편에 자식 다섯을 어디 보호기관에 보내지 않고 키워내 준 부모님, 특히나 젊은 시절 노름도 하시고, 가정에 관심 없고, 때론 폭력까지 행사하셨던 아빠 곁에서 끝까지 살아내면서 우리를 버리지 않은 엄마에게 너무나 감사드린다.

“그때 왜 도망가지 않았냐? “ 묻는 말에 ” 그땐 다 그러고 살았다 “라고 답하시지만, 그보다 자식 사랑이 너무 크셔서였겠지. 그리고 아빠의 가장 역할은 형편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에겐 너무 잘생긴 아빠를 사랑한 이유도 있고.


결국 모든 인간관계는 일방적일 수 없다.

그게 부모 자식 간이라 할지라도.

내가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이 당연한 게 아니듯 내가 부모에게 받은 사랑도 당연한 건 아니다.

감사함으로 받고, 감사함으로 돌려드려야겠다.



사진 출처 pinterest  : 내가 어릴 적 시골에서 살던 시절 그 토방의 모습과 너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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