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를 가다.
초등학교 6년 , 난생처음 교보문고를 갔다.
나는 책이라는 걸 돈 주고 산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고, 세상에 그렇게 많은 책이 한 곳에 모여있는 곳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전라남도 끝자락에서 태어나 여섯 살까지 살다가 서울에 올라왔지만, 거의 숟가락과 이 불 몇 채만 챙겨 올 정도의 가난함으로 도배된 우리 집 살림이 쉽게 나아질 리가 없었다.
자식은 다섯이나 있었고, 시골에서 농사짓던 아빠와 엄마가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몸으로 하는 일뿐이었다.
그나마 엄마는 생활력이 강하셔서 다섯 자식 먹여 살릴 욕심에 큰 다라를 머리에 이고 집집마다 들러서 장사를 하러 다니셨고, 아빠는 흔히들 노가다라는 일밖에 할 수 없었지만, 그마저도 열심히 하지는 않으셨다. 시골에서부터 부지런하지 않아서 살림을 말아 드신 분이 서울에서 바뀔 리 없었다.
불행히도 나에게 ‘빈부’(貧富)라는 개념이 생겼을 때 우리 집은 이미 가난했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나랑 10살 차이 나는 큰언니 말로는 우리 집이 꽤 부자였다 했다.
하지만 아빠는 놀음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고 세 박자 골고루 갖추신 분이라 돈이 모아지질 않았다.
무능한 아빠는 큰딸은 처음부터 돈벌이 정도로 생각하셔서 중학교를 졸업시키자마자 취직을 시키고 싶어 하셨다. 우리 중 제일 머리가 좋은 큰언니는 공부가 너무 재밌었고 계속하고 싶었지만 가난한 부모를 만나 그 꿈을 펼쳐보지도 못했다.
엄마는 본인이 공부를 많이 못해서 학업에 중요성을 모르셨던 것인지 아니면 너무 완고한 아빠를 도저히 설득시킬 자신이 없던 것인지, 아니면 그 당시는 다들 큰딸은 그렇게 키웠던 사회적인 분위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암묵적인 동의하에 큰언니는 취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 당시에 벌이가 꽤 괜찮다고 소문이 난 버스 안내양에 어렵게 취직이 되었지만, 멀미가 너무 심한 탓에 계속 그 일을 할 수 없었고, 덕분에 아빠에게 많이 혼이 났었다고 한다. 그다음에 취직한 곳이 공장이었다.
우린 그때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공돌이, 공순이’ 이렇게 비하하며 불렀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기 삶을 살아내던, 누구에게도 무시받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큰언니는 우리가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 정말 치열하게 살면서 그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끊임없이 업그레이드시켰고 결국은 ‘공순이’에서 공장의 디자이너가 돼 있었다.
언니는 항상 뭐든 배우고자 하는 의지와 도전 정신이 강했다. 또한 본인이 문화생활을 누려보질 못했고 또 그런 것에 대한 중요성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우리가 서울에 갔을 때 동생들을 데리고 뮤지컬 공연을 데려간다던가, 서점을 데려간다던가 그런 경험을 시켜주었다. 그 덕에 큰언니 덕분에 평생 처음 교보문고를 갔고, 처음 산 책이 바로 ‘창가의 토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