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터와 설계도
집터와 설계도는 운명으로부터 받지만 그 집을 지어나갈 사람은 바로 나다.
집의 크기와 골조, 대략적 형태만 그려져 있는 미완성의 설계도를 완성해 가야 할 사람도 나다.
입주자가 미성년인 동안은 그 일을 부모가 대행해 주면서 집 짓는 방법과 관리법까지 가르쳐 주지만 성인이 되고 나면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해야 한다.
건축자재는 어떤 것을 쓸 것인지, 실내 장식은 어떻게 할 것이지, 외벽은 어떤 색으로 칠할 것인지, 지붕은 어떤 모양으로 할 것인지, 이 모든 것이 내 의지에 달렸고 내 책임하에 있다.
넓은 터에 대저택을 지을 설계도를 받았다 하더라도 집주인이 게으르고 방탕하여 부실한 골조공사에 , 성의 없이 대충 지은 집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외장 도색과 실내장식에, 관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 넓은 정원에 잡초만 무성하다면 누가 그 집을 부러워할까?
비록 집은 작지만 튼튼한 자재로 뼈대를 잘 세우고, 그 위에 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멋진 집을 짓고, 마당에는 아름다운 화초를 심고, 평생토록 잘 관리해 나가면 그 집이야말로 작아서 아담하고 예뻐서 빛나는 누구나 탐내는 그런 집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집이 왜 필요한가? 그것은 그 집에 함께 거주할 가족을 위해 있다.
아무리 비까번쩍한 집이라 할지라도 가족 간에 불화하여 함께 식탁에 앉을 때마다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고 날 선 대화만 오간다면 그 큰 집이 무슨 소용 있으랴?
아무리 작은 초가삼간이라도 저녁이면 조촐한 밥상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웃음꽃을 피우며 훈훈한 대화를 이어간다면 지나가던 나그네도 하룻밤 묵어가고 싶지 않겠나.
이것이 바로 운명과 함께 주어진 또 하나의 선물, 자유의지의 힘이다.
2) 드라마 속의 배우
인생은 한마당 연극과 같고 그 연극의 주관자는 연출자다.
그는 대본을 쓰고 배역을 정하고 모든 것을 감독하고 이끌어 나간다.
하지만 연기는 전적으로 배우의 몫이다.
관객이 모이는 것은 연출자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펼치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다.
일단 무대의 커튼이 올라가고 나면 그때부터는 배우들이 그 극과 드라마의 꽃이 된다.
아무리 시나리오가 훌륭하고 연출력이 뛰어나도 배우들의 연기가 신통찮으면 그 드라마는 망치고 만다.
모든 배우의 꿈은 주인공 역을 맡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아무나 될 수 없다.
그 역에 딱 맞는 외모와 체격 조건, 풍겨 나오는 분위기, 그리고 그 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갈 만한 연기력. 이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을 때 감독은 그를 주인공으로 낙점한다.
여기에 더해, 명품 조연배우 신정근의 말은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2013 년, 한 메이저 일간지에 실린 그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기자가 '이쯤 되면 주연 욕심이 나지 않느냐?'라고 하자 그는 솔직히 생각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주연을 하려면 연기력 말고 인격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두 시간 동안 스크린에 나오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배우의 인격이 드러나거든요. 그래서 전 조연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아요."
이 말 한마디는 내 가슴에 강한 공명을 일으켰고 그때부터 나는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배우가 직업이 아닌 우리들에게,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소중한 메시지를 던졌다.
연극이나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건 주연배우다.
하지만 주인공이 빛 나려면 여러 조연들의 연기가 잘 받쳐주어야 한다.
드라마의 경우, 그 극의 주인공이 튀는 캐릭터가 아닌 데다 연기까지 고만고만할 때 그 극을 살리는 것은 연기력이 출중한 조연들이다.
시청자들은 이들을 보는 맛으로 다음 편을 보게 되고, 그리되면 시나리오 작가는 그런 조연들의 분량을 점점 늘리게 된다.
조연이라 해서 만년 조연만 하라는 법도 없다.
아무리 단역이라 해도 맡은 바 최선을 다해나가면 조연으로 발탁되고, 조연 중에서도 명품 조연으로 발돋움해 나가면 언젠가 자신의 캐릭터와 꼭 맞아떨어지는 작품을 만났을 때 주연 배우로 탈바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어진 운명을 뛰어넘는 위대한 자유의지의 힘이다.
3) 인생이란 길
신은 대체 무슨 뜻으로 이런 일을 벌일까?
그렇게나 무식하고 잔인한 존재여서 그런 짓을 벌일까?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타인과의 경주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던 자신을 성숙한 어른으로 연마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자유의지의 위대함이자 책임이다.
*표제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