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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 Nov 12. 2024

수능이 40시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뉴스로 특정 분야에 뛰어난 두각을 보이는 아이가 나올 때, `저런 아이는 이 사회에 이바지를 해야 한다, 좋은 일을 하길 바란다‘ 등의 댓글을 보기 너무 불편했던 시절이 있었다.


기가 쎄거나, 과학은 좋아하는데 남들에 대해선 지극히 관심 없는 부류의 아이는 좀 괜찮았다. 내 걱정을 부풀리던 케이스는 좀 섬세해 보이는 아이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아이. 눈치가 빠른 아이.


대다수는 사실 한 번 던지고 잊고 마는 그 말에 아이가 나처럼 너무 막중한 책임감을 느낄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저렇게 예민한 아이는 대개 사회지능도 높아서, 몇몇 어른들의 말에 담긴 진짜 뜻, ‘봉사 안 하고 돈 많이 버는 직업 하면 나는 너를 욕할 거야’ 혹은 또 완전히 반대로 ‘돈 안 되는 이상한 직업 하면 나는 너를 비웃을 거야’도 다 읽어낼 걸 알았다. 나는 그 아이들이 나처럼 그 안에서 어떤 사회적 규칙을 지켜야 할지, 너무 혼란스러워하지 않길 바랐다.




나는 내가 음악을 하고 싶었을 때 무슨 사형 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한 게 있는데 무슨 음대를 가냐고 할 게 짐작되는 사람들이 있었고, 내가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 충족해야 할 사회적 역할과 굉장히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 사람들이 내가 음악하고 노는 걸 기대하진 않는 것 같았다.


미숙한 10대 때 내 원망의 화살은 내게 도통 관심 없던 이들보다, 오히려 나를 좋아해 주고 기대를 많이 하던 이들로 향했다. 내 진짜 꿈엔 신경 쓰지 않는다고, 전부 가식처럼 보였던 그런 날이 있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더 미웠다.


하지만 재밌게도, 무너지는 순간에 나를 지탱해 주던 것 역시 또 그런 사람들이 뿌린 지극한 애정이었다. 꼭 어른이 되어서 다시 만나자고 하셨는데, 내가 그걸 지키기엔 너무 부끄러운 어른이 되었다는 죄책감까지 겸해서.


사주, 타로 이런 거에 눈길도 안 주는데, 30년 전 태몽까지 우려먹으면서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거의 30살 다 되어가는 고졸 딸에게 저런 스케일 큰 말을 하는 우리 아빠를 보자. 이게 애정이 아니면 뭔가.




나보다도 훨씬 현명할 뉴스 속 그 아이들은 그런 말들이 잠시 상처가 되는 순간이 온다 한들, 끝내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서 성장할 거라 믿는다. 나도 해낸 걸 그 애들이 못할 리가 없다. 그러니 방황하는 순간이 올 때 그 시절을 버텨낼 사랑을 가능한 많이 받길.


사회적 공헌을 해야 한다는 세뇌가 무서워서 숨어버린 아이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따라오는 남의 질투가 무서워서 숨어버린 아이들. 끝내 목표하던 사회적 역할은 수행했는데 그래도 아직 어딘가에서 방황 중인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위해서 수능을 치르기로 했다. 우리는 끝내 자기 자신을 찾아낼 거라는 희망을 주고 싶으니까.


ㅋㅋ내일 모랜데.. 정신을 좀 차려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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