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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새 Apr 16. 2024

할머니의 촉석루

어린 나를 돌보신 할머니

 어린 시절 촉석루가 있던 공원이 나의 놀이터였다.

 그 시절에는 요즘처럼 아이를 적게 낳는 때가 아니라 시골에는 보통 10형제가 넘는 경우도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 형제가 2남2녀니 그 때 당시만 해도 자식 수가 마침 맞다고 어머니가 자주 말씀하셨다. 생각하면  요즘엔 둘도 키우기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아무리 그 시절이라도 넷을 키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동생이 나와 다섯살 차이니까, 아마 내 나이가 다섯 살이나 여섯 살 때까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도 할머니가 곧잘 데리고 다니신 것 같은데, 동생이 태어나 난아기 돌보느라 어머니의 손이 제대로 미치지를 못하니 할머니가 나를 맡아 챙기시지 않았을까 싶다.

 할머니의 친구 집, 할머니가 다니시던 절, 할머니의 친정인 진외갓집. 어머니와 함께 다닌 기억이 거의 없는 대신, 할머니와 함께 다닌 기억이 많이 남아있다.

 할머니는 촉석루 나들이를 자주 하셨다. 내가 촉석루 공윈에서 풀로 빗자루를 만들고, 토끼풀 반지나 머리띠를 만든 기억이 나는데, 아이 혼자 가기에는 먼 거리라 할머니가 데리고 다니신 것 같다.

 당시는 촉석루 출입이 자유로웠는데, 여름 뿐이 아니라 봄이나 가을에도 자주 나를 데리고 촉석루를 가셨다.

 촉석루에는 에는 할머니들, 다른 에는 할아버지들이 각각 몇명씩 팀을 만들어 둘러앉아 심심 풀이 화투를 치곤 했다. 

 판돈이 일원 정도 였던 것 같다. 일윈이면 간단한 사탕 같은 군것질 거리를 살 수 있었다. 할머니의 성적이 좋은 날은 가끔 내게 일윈씩 주시기도 했다.

 돈이 떨어지면 광만 팔고 나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름이면 촉석루의 바람이 어찌나 시윈한지. 집에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조차도  갖추지 못하고 사는 형편이 대부분이었으니, 강바람이 후한 촉석루 너른 마루야 말로 진주 시민들의 최고 피서지가 아닐 수 없었다.

 돗자리까지 준비하고 한나절 화투를 쳤던 할머니들끼리 친하게 지냈으며 지정석까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진주를 떠나산 지 30년이 훌쩍 지나 다시 찾은 촉석루에 들어서니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그때 그 자리가 여기 쯤인데. 짐작되는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할머니와의 추억에 잠겨보았다.

  촉석루가 한국전쟁(1950.6.25) 당시 전소되지 않았다면 보물이 아니라 국보가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국보 제276호였다고 한다. 1960년에 옛 모습을 되찾았다고 하는 기록에 맞추어보면, 내가 할머니를 따라다니던 때가 중건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던 것같다.
 여름에 다른 곳은 아무리 더워도 촉석루는 늘 강바람으로 시원하였다.
 어김없이 시원한 마루에 돗자리는 깔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이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없이 억울한 청상과부가 되어두 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 공부를 시키느라 삯바느질을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을 잘 받아들이고 일찍 사범학교로 진학하셨다. 당시 보통학교 졸업 후 5년제 사범학교를 들어간 것이 아버지로서는 최선의 선땍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돈을 벌게 되면서 바느질을 그만 두셨는지, 할머니가  옷을 짓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평생 삯바느질을 하셨으니 질릴만도 했겠지 싶다.

 가끔 바는질 할 일이 생기면 내게 바늘 귀에 실을 끼워달라고 부틱하셨다.

 팔자라고들 말한다. 그저 타고난 팔자니 어쩌겠느냐고. 옛 어른 들은 그렇게 자신의 부당한 처지를 항변하지 못하고, 운명에 따라 살아오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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