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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랙버드 Apr 06. 2023

[상담 일지]2023년 3월 22일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상담실 의자에 앉아 선생님과 눈을 맞추고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약간의 긴장과 어색함이 느껴진다. 선생님은 내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린다. ‘몸이 안 좋아서 힘들었다 ‘, ’ 오는데 차가 막혀서 마음이 급했다 ‘, ’ 날씨가 많이 풀렸다 ‘와 같은 가벼운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일상에서 내가 했던 말, 느꼈던 감정(부정적 감정)을 이야기하며 더 깊어지고 뒤이어 내면 깊숙한 곳에 엄청난 불안과 분노와 시기심이 있다는 것을 얼핏 확인하게 된다. 그것을 ’얼핏‘ 확인하는 것은 무척 괴롭다. 차라리 근원을 알고 제거할 수 있는 것이라면 좋겠는데 아직도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


아들이 핸드폰과 한 몸이 되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불안했다. 주로 유튜브 쇼츠를 보는데 짧게 스쳐 지나가는 자극이 일상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중3이니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이내 그에게 흘러가 잔소리로 변해있었다. 완전히 해제했던 스크린 타임을 다시 재개시켰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면 강제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며 하루 세 시간 사용을 통보했다. 한편으로는 비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했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


“너는 핸드폰을 평균 아홉 시간씩 하고 있어. 이건 아니지 않아? 네가 스스로 조절할 수 없다면 강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공부를 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공부할 마음이 있는데 핸드폰이 방해가 된다면 그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게 맞잖아. 사람의 의지는 믿을 게 못 돼.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한다면 환경을 만드는 게 더 좋은 방법이라고 하더라. 어떤 사람은 핸드폰을 2G 폰으로 바꾸고, 어떤 사람은 힘들면 누울까 봐 침대도 없애버리고, 어떤 사람은 좁은 박스를 갖다 놓고 그 안에 들어가서 공부하기도 해. 그렇게 독하게 환경을 만들어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걸 이루는 사람들이 있어. 그렇게까지 하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네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그것을 계속 시도해 보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게 의지로 되지 않는다면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지. 엄마는 너의 독립과 자립을 돕는 사람이고 네가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싶어. 이제 엄마가 왜 스크린 타임을 부활시켰는지 이해했어? ”


아이는 반박하지 못했다. 선생님과 이 에피소드를 나눴다. 선생님은 아이가 무엇을 보냐고 물었다. 게임유튜브를 보는데 중간중간 과학에 대한 영상도 본다고 말했다.


“아이가 그래도 그 시간을 허투루 쓰지는 않네요. 자기 안에 지식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 같네요. 엄마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는데요. 엄마가 맞는 말을 해서 아이는 반박을 하지 못했지만 아마 그 아이는 너무 답답했을 것 같아요. 엄마가 너무 똑똑한 엄마라서 시기심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자기는 똑똑하지 못해서 좌절했을지도 몰라요. 이제 지적인 자극을 주는 것보다는 마음을 읽어주는 엄마가 되어주는 게 어때요? “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늘 아이를 어떻게 하면 내 뜻대로 설득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정작 그 애의 마음이 어떤지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언젠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기는 도통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엄마, 내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 사람 마음에 공감이 안돼.”


이 말을 선생님께 전했는데 선생님은 아마 아이는 자기의 마음을 모르겠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고 했다.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고 공감해 주는 엄마가 되어주라고 했다. 상담을 하면서 나는 충분히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이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문제가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자기를 나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를 키워가고 있는 것을 나는 몰랐다. 아이의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교정하는데만 힘썼다.


내가 아이를 교정하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을 고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나를 모르고 알면 알수록 어렵고 보기 싫은 모습이 드러난다. 그럴 때마다 화가 나고 그 화를 누군가에게 풀어버리려 하고 그 누군가가 아이일 때가 많다. 결론은 늘 똑같다.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그 관용적인 마음으로 타인도 품을 수 있게 된다는 것, 내가 나를 수용하지 못하면 타인도 수용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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