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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랙버드 Feb 08. 2022

좌절될 희망

정체성과 증상을 오가는 괴로움

이사를 가려고 짐을 정리 중이다. 꺼내 놓고 보니 일정한 패턴이 보인다. 20년 전에 모아놓은 백여 개의 십자수 실부터 물감 세트, 읽지 않은 책, 틈나는 대로 사서 모은 그릇까지. 모든 물건들이 세트로 있고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이 대부분이다. 세트 중 갖춰지지 않은 물건이 있을 때는 그것을 꼭 채웠다. 반드시 플세트여야 했다. 채우고 나면 그 물건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충동을 조절하는 것은 성숙함의 척도다. 나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 남들은 할 수 있는 일을 나만 못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그랬다. 그런데 이것이 병의 증상이라고 한다.


3년 전 조울병 진단을 받았다. 조울병은 양극성 정동장애라고 한다. 양 극단의 기분을 오가며 떠오르고 추락하기를 반복한다. 조울병은 증상에 따라 1형과 2형으로 나뉜다. 나는 2형으로 진단받았는데 2형은 울증기가 길고 가벼운 조증이 나타나는 특징 때문에 우울증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조울병을 공부하면서 과거의 행동을 증상과 연결 짓게 된다. 나의 가장 주된 증상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상황 판단 없이 계속해서 물건을 사들이는 것이었다. ‘나의 뛰어난 재능’을 빨리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과도한 소비의 핵심 동력이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리하게 일을 벌이는 것은 조울병의 증상 중 하나다. ‘나의 뛰어난 재능’을 펼치기 위해서는 그 물건이 반드시 필요했다. 재능이 ‘남달리’ 많았기에 그에 걸맞은 물건을 사고 또 샀다. 사다 보면 함께 있으면 좋을 다른 물건으로 눈길이 옮겨갔고 필요의 이유를 대기 위해 생각은 질주했으며 손가락은 바빠졌다.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재능에 걸맞은 꼭 필요한 물건’은 몇 번의 터치로 쉽게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조증기의 자신감으로 시작한 일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물건들은 쌓여갔다. 자아도취와 과대망상의 결과는 너무도 참혹했다.




익숙한 이길 끝엔 문이 있죠
늘 지나치고도 못 봤던 그 문
어서 가서 문을 열어





20년 전 모아두었던 십자수 실을 꺼내본다. 왜 버리지 못했을까. 쓰지도 않은 그 많은 실을 버린다는 것은 실패를 의미한다. 버리지 않으면 변명할 수 있다. 언젠가 다시 하겠다는 다짐이라도 품고 있어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20년 동안 쓰이지 않은 십자수 실은 말한다. 결국 하지 못했다고. 재능이 아니라 증상이라고. 그러니 이제는 자신을 믿지 말라고. 진실은 아픈 법이다. 전지전능의 황홀함에서 현실의 차가운 바닥으로 추락할 때의 고통은 울증기의 내가 감당해야 한다. 벌여놓고 실패한 많은 일들은 울증기의 내가 직면해야 한다. 수많은 물건이 집안을 채우고 나면 길고 긴 울증기가 찾아왔다. 삶은 그렇게 반복됐다.




충분히 강하다 믿어요
보여줘요 숨은 진실들을
고통과 상실 받아들여요
아물 때가 더 아린 법



항상 잘못하는 것 같았다. 눈치가 보였다. 혼란스러웠다.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미워했다. 병의 이름을 알고 나서는 마음이 편해졌다. 더이상 이런 생각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어디가 아픈지 말할 수 있다. 도움을 청할 수 있다. 통증의 원인을 찾았으니 치료와 완치를 위해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알면 조심할 수 있다. 진단명은 그런 면에서 도움을 준다. 그러나 진단명은 주홍글씨, 낙인, 꼬리표가 된다. 생각과 행동이 병의 증상인지 아닌지 매 순간 점검하는 것이 일상이다. 목이 졸리고 숨이 막히는 기분으로 하루를 버틴다. 휴대폰을 끄고 손을 묶고 싶다는 그때뿐인 생각을 한다. 나는 죄인이 되고 경찰이 된다. 물건을 사고 싶은 생각이 들면 경찰이 출동해 그 생각을 감옥에 가둔다. 사고 싶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을 때는 자기를 미워하라는 중벌을 내린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탈옥수가 되어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는다.


아이디어가 번뜩였고 횔기찼고 산만했고 덤벙댔고 실수 투성이에 지각을 밥먹듯이 했고 즉흥적이었고 말이 많았고 낄낄거렸고 자유롭고 열정이 넘쳤고 깨어 있고 크게 웃고 흥과 끼가 넘쳐났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병을 알고 나서 나는 위험한 존재가 됐다. 마음껏 웃고 울고 사랑하는 순수한 감정까지도 의심한다. 감정의 고양은 조울병의 증상이다. 어떤 감정이 어떤 행동을 유발할지 알 수 없다. 내 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실망을 안겨주는 병이다.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아서 자신을 감시하고 냉정하게 대해야 하는 병이다. 존재 자체가 고통인 병이다.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초조해진다.




다시 살아날 수 있어요
느껴봐요 벅찬 새 인생을
내 안에 붙은 죽음을 지워
긴 숨을 쉬며 견뎌봐



죄책감에 버리지 못했던 물건. 실패를 증명하는 물건. 오랜 세월 나에게 손가락질하던 물건. 그것들을 중고시장에 팔고 나누면서 비워내고 있다. 십자수 실은 무료 나눔을 통해 진짜 주인을 찾아갔다. 진실을 외면한 채 가까스로 끌어안고 있던 물건이 쓰임이 생기는 것을 보며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과거에 저질러 놓은 잘못을 마주하는 고통이 만만치 않지만 이 일이 큰 위안을 준다. 자기 합리화로 찌들어 있던 자아가 드디어 해방을 맞는 것 같다. 물건을 꺼내놓고 바라보며 그때의 나를 떠나보낸다.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안고 어떻게든 살아보려 애쓴 흔적들. 사랑을 주기 위해 배우고 공부했던 물건들이 보인다.  지독하게 매달렸던 시간이 모두 공중에 흩어지지는 않았겠지. 마음 어딘가에 남아 나를 살리고 있겠지. 그렇게 믿고 싶다.


중고시장에 드나들며 생긴 활력으로 몇 가지 물건을 더 샀다. 버릴 뻔한 물건을 팔아서 번 돈은 없어질 돈이었으니 쓰기도 쉬웠다. 이럴 때를 대비해 신호를 보내달라고 반려인에게 부탁했다. 나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에게 고백하고 멈추고 있다. 정신과 주치의 선생님은 조울병에 해당하는 약의 용량을 늘려주었다. 아직은 조절하는 것이 버겁다. 비어있는 통장 잔고와 위기를 맞은 재정상황에 죄책감까지 더해져 괴롭다. 증상이  나이고 내가 증상이 되었다.  의사는 조증기의 고양된 기분 때문에 물건을 사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약의 용량이  늘어난 뒤에 충동은 줄었지만 생기도 사라졌다. 무엇이 진짜 나일까? 잘 모르겠다. 화나고 슬프고 혼란스럽다. 그렇다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내가 원하고 사랑하는 조증의 나를 살리고 증오하고 죽여 없애고 싶은 조증의 나를 달래며 평생을 사는 수밖에 없다. 완치의 희망은 좌절될 희망이다. 그것을 알고 사는 것이 치료이자 희망이다.




지금은 과정일 뿐이죠
예전에 몰랐던 맑은 느낌
강한 치료도 효과는 오래 못가
여기서 끝내면 안 돼
한번 더 용기를 내봐요
희망의 힘이란 놀라운 것
완치란 없죠 그렇다고 절대
다 포기할 순 없는 일



<조울병, 나는 이렇게 극복했다> 중에서

표지 : <블랙독> 레비 핀폴트

삽입 이미지 : <블랙독> 레비 핀폴트

인용 :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OST

(크레딧 - 명확한 생각을 찾아요 / 나 떨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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