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교사 의원면직 03
의원면직을 결심하고 나서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이후 행로에 대해 방향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 큰 틀이 세워져야 세부적인 계획도 세울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꾸준히 탐색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부모님과 대화도 주기적으로 했고,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했으며, 전문가의 상담을 받기도 했어요.
나는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응시했습니다. 갑자기 수능이라니, 뜬금없어 보일 수 있겠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수능이라고 판단이 되었어요.
학교 일은 재밌었지만 공교육은 교사 개인의 노력의 결과가 눈에 수치화되지 않으며 그에 따라 보상도 받을 수 없는 구조여서 이과적 성향이 짙은 나에게는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습니다. 무능력에 따른 책임을 고스란히 내가 모두 떠안아야 한대도 상관없으니 앞으로는 내 성향에 맞는 이공계나 과학 분야의 일을 선택하고 싶었어요.
또 학교가 답답했던 나는 더 넓은 세상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또 내가 그런 기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었어요. 학교에서는 영어를 아무리 잘해봤자 결국 원어민 뒤치다꺼리나 하게 되었던 게 큰 불만이었고, 짧지만 강렬했던 뉴욕 생활을 통해 글로벌 인재로 거듭나고 싶은 욕구도 커져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게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수학 과학을 할 줄 알아야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능 공부를 하면서 고등 수학 과학을 리마인드도 하고 내가 어떤 과목을 왜 흥미로워하는지 살펴도 보기로 했어요. 만약 수능 점수가 기대 이상으로 잘 나온다면 내가 동물을 좋아하니 수의대를 가면 어떨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컴퓨터 프로그램 다루는 걸 너무 좋아하고 잘했어서 소프트웨어 공학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세 달간 매일 15시간씩 수능 공부를 했어요. 수능 대신 소프트웨어 개발 공부를 할까 고민도 했지만, 수능은 때와 시기가 있으니 수능이 우선이었습니다. 11년 만에 돌아간 수능판은 완전히 달라져 있어서 정말 너무너무 낯설었어요. 그렇지만 적응하는 데 여유 부릴 시간도 없어 닥치는 대로 미친 듯이 공부만 했습니다.
수의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살면서 공부를 못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정시로 메디컬을 노리기엔 참 애매하고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아요. 게다가 10년 동안 손 놓고 있던 공부를 두세 달 공부해서 전국 1% 안에 들 수 있을 리가요. 그럼 결국 안 될 일이니 적당히 공부했냐 하신다면 그건 또 아닙니다. 그와 상관없이 모든 걸 쏟았어요. 칼같이 매일 여섯 시에 일어났고 밥 먹을 시간도 아껴가며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나를 테스트하고 싶었어요. 앞으로 몇 년 더 수능에 도전하며 수의대 진학을 노릴 것인가? 막상 건드려보니 수학 과학에 흥미도 능력도 없으므로 이공계 진출은 포기하고 기획이나 마케팅 등 새로운 분야를 탐색할 것인가? 다 떠나서,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 공부할 의지와 열정이 있기는 한가? 머릿속을 맴도는 수없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고 싶었어요. 나는 이번 입시를 통해 짧고 굵고 빠르게 판단하기로 했습니다.
성적은 괜찮고도 아쉬웠습니다. 미적분과 영어에서 1등급을 받았습니다. 근의 공식도 잊어버려서 중학교 수학부터 출발해야 했던 걸 생각하면, 그리고 투자한 기간과 대비하면 현실적으로 괜찮은 결과였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보시곤 기뻐하셨습니다. 내가 아쉬워서 재도전할 거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근데 말이죠.... 공부하는 동안 모든 과목 중에서 생명과학 공부가 정말 더럽게 싫었어요. 재미도 없었어요. 그러니 수의대에 가겠다고 이 짓을 몇 년 더 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몇 년 더 공부한다고 꼭 붙을 수 있는 곳도 아니고 말이죠. 명예롭고 안정적인 전문직을 가지고 싶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를 가장 즐겁게 했던 과목은 수학과 지구과학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지구과학을 선택하지 않았던 터라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우주과학 공부가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나는 확실히 깔끔하게 떨어지는 논리와 계산, 알고리즘이 좋았습니다. 그러니 소프트웨어로 가야겠다고 결론지었어요. 이렇게 후회나 미련 없이 깔끔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건 누구보다 열심히 했기 때문입니다. 매일 6시에 일어나 밥 먹을 시간도 아껴가며 15시간씩 공부한 세 달이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아, 그리고 우주과학은 관련 서적을 찾아 읽고 다큐멘터리와 영화도 찾아보는 등 계속해서 취미로 즐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능 다음날 아침부터 바로 개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국비지원제도 덕분에 요즘 너도 나도 개발에 뛰어들었다가 중도 포기하는 사람이 참 많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세 달 동안 미친 듯이 공부에 매진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나는 분명 개발 공부도 열심히 꾸준히 할 수 있겠다는 자기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 덕분에 도전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책과 인터넷 강의를 통해 독학으로 입문 기초를 닦으면서 어떤 개발 분야가 나에게 맞을지 찬찬히 알아보고 있는 중으로, 백엔드도 재밌고 프런트엔드도 재밌어서 풀스택으로 가야 할지 등등 이런저런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또 수능 점수가 괜찮으니 늦깎이 새내기(일명 헌내기)로 입학을 해서 학위를 따 볼지, 아니면 4년을 다 다시 다니기는 좀 너무하니 편입을 또 준비해야 할지와 같은 고민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개발자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틈틈이 브런치에 기록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도전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도전하는 나는 아름답습니다. 나는 나를 응원해요. 세상의 모든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응원과 격려의 메시지를 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