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인 내 친구 역시 "모차르트는 피아노 학원에서 어린아이들이 치는 걸 듣는 게 가장 아름다워."라고 한다.
대체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날까? 어떤 학자들은 '모차르트의 음악이 단 한 번도 수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그의 악보들에는 수정한 흔적이 단 한 곳도 없다. 모차르트에게 음악이란 '노력의 산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음악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면 그의 천재성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MBTI의 세 번째 자리에 S 대신 N이 자리 잡은 사람으로서 궁금한 것이 있다. 내가 모차르트와 동시대의 음악인이었다면 모차르트를 싫어했을까 혹은 존경했을까? 왜 이게 궁금하냐고?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비해 그의 죽음은 처참했다. 재산과 건강은 물론 주변인들까지 잃은 채 요절하였으며, 그의 죽음에는 누구도 곁에 있지 않아서 현재까지도 그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였는지 알지 못한다. 심지어 같은 궁정에서 일하던 동료 작곡가(안토니오 살리에리)가 그의 실력을 너무나도 질투한 나머지 그를 독살했다는 루머까지 퍼진다.
모차르트의 생애를 다룬 영화 <Amadeus>, 1984 개봉
극 중에서 모차르트를 독살했다고 주장하는 '안토니오 살리에리'역을 맡은 머레이 아브라함(F. Murray Abraham)은 1985년 5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살리에리의 독살이 루머였다면, 실제로 음악 사조의 한 시기를 마침과 동시에 다시 시작한 베토벤조차도 모차르트의 후광에 밀려 혹독하고 참담한 데뷔 무대를 치러야만 했다. 심지어 베토벤의 아버지는 자신이 봤던 14년 전의 모차르트처럼 베토벤을 '신동'반열에 올려놓기 위해 아들의 나이를 두 살이나 속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베토벤은 이후 음악사에 길이 남을 '악성'이었으나, '신동'은 아니었다.
물론 주정뱅이라고 소문난 베토벤의 아버지 역시 모차르트의 아버지처럼 훌륭한 교육자도 아니었고.
*모차르트는 1756년생이고, 베토벤은 1770년생이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신동'과 '천재'로서 화려한 삶을 살다가 아무도 모르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였고(심지어 그는 시신도 찾을 수 없어서 비엔나의 중앙 공동묘지에는 기념비만이 존재한다), 베토벤은 비록 '천재'라는 평가는 얻지 못하였으나 자신의 신체적 한계와 모든 노력을 동원하여 결국 ‘악성(樂聖)’, 음악의 성인(聖人)으로서 인정받아 그의 장례식에는 2만 명의 추모객이 몰렸다.
베토벤은 다음에 본격적으로 언급하기로 하고,
우리는 이 화려한 관심과 참담한 죽음을 한 생애에 담아낸 비운의 천재, 모차르트의 유년기에 대해 논해보자. 그의 대표적인 초상화에 보이듯이 그의 용모는 동글동글하고 단정하다. 그리고 키마저 작았다.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163cm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러한 용모가 그의 ‘신동’ 이미지에 더 큰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는 4살 때부터 하프시코드(현재 피아노의 전신)를 마스터하였고, 5살이 되자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 싱글벙글 종이에 무언가를 그리는 모차르트의 모습에 아버지의 친구가 “뭐하니 볼프강?”이라고 묻자 “협주곡을 작곡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한 일화는 정말이지 모든 음악인의 사기를 꺾기에 충분하다. 5살 때 나는 한글을 겨우 읽었는데.
7세가 되자, 모차르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율 한 가지를 통해 즉흥적으로 방대한 화음을 섞어 완벽한 곡을 만들 수 있었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 Leopold Mozart, 바이올리니스트)는 음악가로서 아들의 재능을 바로 알아보았고, 잘츠부르크 대주교(당시에는 궁정과 종교에 속하여 음악가로서의 생계를 지속하였다) 오케스트라에서 부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발전보다 아이들의 음악 교육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레오폴트는 모차르트를 데리고 유럽 전역의 대도시들을 돌아다니며 그의 아들을 자랑한다. (하긴 나 같아도) 그의 음악은 그의 나이만큼 순진하고 새로웠으며, 아이용으로 제작된 연주자용 가발을 쓴 모차르트는 모차르트가 아니라 다른 7살이더라도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모두가 신동 모차르트를 사랑했고, 그를 미워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어린 모차르트는 가끔 부담스러운 관심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울음을 보이기까지 했는데, 여러모로 놀리기 좋은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어느 날 궁정에서 연주하던 모차르트는 자신의 연주에 심취한 나머지 그만 하프시코드 의자에서 떨어졌고 음악을 감상하던 예쁜 공주님은 넘어진 모차르트에게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운다. 그녀의 미모에 반한 모차르트는 그녀의 볼에 뽀뽀하며 "공주님, 공주님, 나랑 결혼해주세요."라고 청혼한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그의 변태적인 면모도 이 나이 때부터 나타난다. 음악을 제외하면 그저 어린아이였던 모차르트는 화장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아주 큰 흥미를 보였다. 하루는 화장실에서 글을 쓰기도 했다. 뭐로 글을 썼는지는... 모두가 아는 비밀이다.
간혹 모차르트의 연주가 그의 '천재성'때문이 아니라 '노력'으로 이루어졌다고 비아냥대는 이들은(근데 10살도 안 된 꼬마 아이가 노력으로 이런 음악을 작곡하는 것은 쉬운가...?) 악기의 건반이 보이지 않게 그 위에 천을 덮어두고 연주하라고 요구하였고, 자신이 듣고 싶은 노래가 있는데 악보를 두고 왔다며 딱 한 번만 불러줄 테니 반주를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물론 우리의 신동 모차르트는 모든 요구를 완벽하게 이행하였다. 결국 그의 천재성과 그 명성은 유럽 전역에 퍼졌으나, 어린 시절 그의 역할은 사실상 화려한 기교를 부리는 광대와 다르지 않기도 했다.
여기서 모차르트의 키에 대해서 한번 더 언급하자면,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트의 욕심으로 인해 하루 종일 마차, 혹은 하프시코드 의자에 앉아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학자들은 모차르트의 작은 키가 이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아마 키뿐만 아니라 그의 만 35세의 요절에 대한 원인 또한 이러한 생활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렇듯 아버지 레오폴트가 기획했던 유년기 모차르트의 '원정 연주 대장정'은 모차르트에게 명성과 음악에 대한 다양성을 가져다주었으나, 큰 부를 주지는 못했다. 청년이 된 모차르트는 이제 아버지를 떠나 '독립'을 꿈꾸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