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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늘 Feb 25. 2024

단골인데 서비스 안 주나요?

“어? 만두 맛이 좀 다른데? 다른 집 거예요?”

“응.”

“왜요? 우리 집 단골로 맨날 사 먹던 그 집 만두 맛있는데, 왜요? 거기 망했어요?”

“아니. 그냥, 거기 저번에 갔을 때 기분이 안 좋아져서 이젠 거기 안가. 단골을 바꾸려고.”     


저녁으로 만두전골을 했다. 갖은 재료를 다져 넣은 소를 만들고 만두피를 빚고 육수를 끓여야 하는, 정성과 솜씨를 요구하는 만두는 나에게 난이도 상인 음식이다. 해서 나는 그냥 집에서 끓이기만 하면 되는 상태의 만두를 산다. 요즘은 시판되는 대기업의 만두도 정말 많고 맛도 나쁘지 않지만 만두를 좋아하는 식들은 은근히 수제 만두를 고집한다. 주재료인 만두와 육수, 갖은 채소를 한가득 사 와서 전골냄비에 담아 끓이기만 하면 푸짐한 한 끼 식사가 되는지라 살림에 재주가 없는 나는 자주 만두 맛집을 이용하는 편이다.


설 명절에는 물론이고 친척이나 지인들의 집 방문 시 만두전골 재료를 한가득 포장해 간다. 일단 푸짐하다. 구수하고 진한 사골 육수와 만두의 조합은 언제나 옳다.     

지난번 가족 모임에도 식구들 수대로 만두를 사 가서 먹으니 맛있다고 인사를 얼마나 받았는지 모른다.


이래저래 만둣집은 나의 단골이 되었다. 자주 가게 되었고 자주 가다 보니 만둣가게 사장님과도 친해져서 언젠가부터는 만두를 주문하고 계산을 할 때면 서비스라며 찐만두 한 팩을 덤으로 주시는 게 아닌가? 왕만두나 물만두를 금방 찜기에서 꺼내어 1인분 포장지에 담아내어 주신다.      

덤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매번 한 팩 1인분 정도를 덤으로 주니 사장님이 손해 보는 건 아닐까 하다가도 에이, 내가 자주 사주니 괜찮아, 이 정도는 받아도 되지, 하는 생각을 나도 몰래 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지난번 만두를 사러 갔었는데 가게에 남자 사장님 대신 여자 주인이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아마 사장님의 아내이지 싶었다. 그녀와는 안면이 없는 상태였다.

동생네 집에 가면서 만두전골 재료를 8만여 원어치 포장 주문했다. 만두를 받고 카드로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려다 나는      

“음, 오늘은 서비스 안 주세요? 사장님이 늘 서비스로 찐만두 주셨는데....”라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건 아니고 당연히 단골이고 이 정도 샀으면 서비스 줘야지 하는 생각이 분명 내 속에 없지 않았던 것 같다.    


“네? 서비스요? 내가 그러지 말라고 말했는데 우리 남편이 계속 서비스로 주었나 봐요.

죄송해요. 요즘 고기랑 채소 값이 너무 올라서요. 남는 게 별로 없어요.”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만두를 헤프게 주지 말라고 아마 아내가 단속을 했는데 남편이 계속 사람들에게 서비스 만두를 제공한다는 거였고 자신은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한 거였다   

  

우와, 나는 갑자기 손 내밀었다가 거절당한 아이처럼 무안해졌다. 당연히 받으리라고 생각했던 서비스를 거절당한 나. 창피함, 무안함, 구차스러움, 그런 느낌들은 곧바로 그녀에 대한 일종의 적의로 바뀌었다.

“네. 잘 알겠어요.”

나는 쌀쌀맞게 대꾸하고는 포장 만두를 들고 만둣가게를 나왔다.   

   

“흥, 단골한테 저렇게 말하다니 저 여자는 장사수완이 전혀 없군. 내가 자주 이렇게 많이 사주는 단골인데. 뭐, 늘 주던 서비스 하나 주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되게 빡빡하게 구네.  

덤도 주고 서비스도 주고 해야 물건 사는 맛이 있지.

다시는 저 집에 가나 봐라. 흥, 만둣가게가 뭐 자기네만 있는 줄 아나?”     

만두 서비스를 달라고 내밀었던 손과 마음이 입은 상처를 치료하기라고 하려는 듯 나는 그녀를 열심히 비난하며 집으로 왔다.   

  

그 이후 나는 다른 만둣가게를 텄다. 그러나 맛은 예전 집만 못했다. 정직한 식구들 입맛은 금방 달라진 맛을 알아차렸고 드디어 오늘 아들이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다.

나는 만둣가게 단골을 바꾸게 된 경위를 무슨 전투 경험담 이야기하듯 의기양양하게 늘어놓았다.


“뭐, 만둣가게가 자기네만 있는 줄 아나 봐. 그 집 단골 하나 잃은 거지 뭐.”     

가만히 듣고 있던 아들은 자못 진지하게 옆의 남편을 향해 의견을 물었다.

“아빠도 엄마랑 같은 생각이세요?”
 “어? 그렇지 뭐, 그래도 단골인데, 늘 주던 서비스를 안 주니까 엄마가 섭섭했던 거지. 난 엄마가 이해되는데.”    

  

“이래서 우리나라 국민성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서비스, 그건 분명히 제공하는 사람의 자유고 선의에 의한 옵션인데 그걸 왜 권리라고 생각하세요?”

공짜, 덤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달라는 거,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건 거지근성 같은 거예요.”

     

“뭐? 거지 근성?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아무리 아들이지만 돌직구로 날아온 자극적인 단어에 나는 이야기 앞뒤 맥락을 살펴볼 생각도 않고 대뜸 목소리를 키웠다.     


“표현이 지나쳤다면 죄송해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팩트는 이거예요.

많든 적든 만두를 가격만큼 제공하고 값을 치르면 거래는 끝난 거고 그 외로 만두를 덤으로 주는 것은 사장님 마음인 거예요.

그 서비스가 자주 계속되니까 엄마는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라고 생각하게 된 거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서비스가 제공 안 되니까 섭섭하고 화가 났던 거잖아요.

그 사장님은 엄마에게 만두 서비스를 반드시 제공해야 할 의무나 이유가 전혀 없어요.

덤으로 주면 고마운 거지 안 준다고 해서 섭섭해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거지요.”   

  

와우! MZ 세대인 아들의, 군더더기 없는 논리로 무장한 이야기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래도 정이라는 게.. 그래도 단골인데..’로 시작하는 나의 말에는 그 어떤 논리도 근거도 힘도 없었다.  

    

‘객관적인’, ‘균형 잡힌’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들의 사고는, 논리는 그런 단어로 무장되어 있었다.

담백한 그 논리가 아름다웠다.

나의 생각과 나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치우침 없는 그 건강한 시선이 내 머리를 한 대 훅, 하고 쳤다.    

시원했다.

‘호의가 계속되면 당연한 줄 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반복되는 호의는 당연한 게 아니라 매번 고마운 거고 매번 감사할 일이다. 그 사실을 왜 자꾸 잊어버리려는 걸까? 만둣가게 사장님의 만두 서비스는 매번 고마운 거다, 당연한 게 아니고.

그 중요한 사실을 잊은 나는 만두 서비스를, 매번 받아야 할 당연한 권리쯤으로 나도 모르게 여긴 게 틀림이 없었다.

     

한참이나 어린 아들에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비스예요’ 하며 건네는 과일 한 톨, 떡 한 무더기, 야채 한 줌은 상대방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베풂이요 호의다. 타인에게서 온 매 순간의 베풂과 호의에 나는 무감각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종교단체 모임에서 설날 떡국을 해서 나누어 먹었는데 몇 사람이 떡국에 들어간 고기가 질기다고, 김치가 너무 익어서 맛이 없다고 불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즐거운 마음으로 떡국 만들기 봉사에 자원했던 지인은 몸보다 마음이 더 피곤했다고 했다.  

    

세상에 당연한 거는 없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내어주는 일엔 언제나 수고로움이 있고 손실이 있다. 누군가의 수고로움과 손실을 기억하는 일에 게을러지고 있었다, 나는.      

무거운 짐 옮기는 걸 매번 도와주는 경비 아저씨, 아파트 장날 시금치 한 줌을 더 얹어주는 야채 가게 사장님. 붕어빵을 5천 원어치 사면 하나 더 넣어주던 아줌마...

덤은, 서비스는 당연한 게 아니다.

매번 충분히 고맙다고 표현해야 할 타인의 선물이다.     

고언을 확실하게 날려준 아들이 새삼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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