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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늘 Mar 07. 2024

'우유 주세요'  VS  '나도 우유 좋아하는데...'


 나에게는 쌍둥이 조카가 있다. 5분 간격으로 태어난 누나와 남동생 남매다. 두 아이는 비슷한 점도 많지만 성향은 완전히 다르다. 같은 엄마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라도 그리 다르다는 것이 신기하다. 아주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쌍둥이 누나는 가지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을 얻는데 남달랐다. 원하는 것을 소유하려는 의지와 행동은 거의 쟁취 수준이었다. 둘이 똑같이 손에 무언가가 쥐어져 있을 때면(그게 먹을 거라면) 자기 것을 얼른 먹고는 동생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휙 하고 낚아챘다. ‘내 것도 내 거, 네 것도 내 거’라는 생각이 아주 아이의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 있기라도 한 듯 그 순간의 표정은 단호하고 거침이 없었다.

장난감을 뺏는 일은 다반사고 자기의 손에 무언가 들려있어도 동생의 손에 있는 것을 우선 빼앗고 보는, 식사 시에도 원하는 반찬이 없거나 기분이 안 좋으면 떼쓰고 부모와 기싸움을 하기 일쑤였다.


지금은 훌쩍 자라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말수도 적어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는 건강하고 평범한 너무도 예쁜 10대 소녀의 모습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변한 조카를 보면 어릴 때 모습이 생각나서 신기할 뿐이다.     

반면 동생은 5분 차이 누나에게 늘 빼앗기고 뜯기는 세월을 한참이나 보냈다. 아이가 여섯 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 기억난다.


동생네 가족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와있던 날이었다. 저녁 식사 후 커피를 마시는 데 나는 커피 대신 우유를 한잔 따라서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남아 조카가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고모, 나도 우유 좋아하는데..”


하고 수줍게 미소 지으며 내가 들고 있는 우유 컵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와! 나는 그 순간 소름 돋을 만큼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냥

“나도 우유 줘.”

“나도 우유 주세요.” 가 보통 아닌가?

아니면 여아 조카라면 씩씩하게 내 컵을 쓱, 하고 가져갈 수도 있었을 것이고.     

‘나도 우유 좋아하는데..’라는 말에 담긴 아이 마음의 줄기들을 헤아려보느라 나는 한참이나 아이의 말에 대꾸를 못 했다.     


소망과 욕구를 명확하고 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나약함?

상대의 배려나 선의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수동적인 모습?

누나에게 자꾸만 빼앗기는 경험을 해서 스스로가 약자라고 생각하는 정체성이 벌써 생겨 버렸나?

정말 그럴까?


“아, 석현이가 우유 좋아하는 걸 고모가 몰랐네.

, 여기 우유. 많이 마셔.”

하며 나는 컵에 우유를 가득 따라 주었다.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우유를 맛나게 들이켰다.

    



어린 조카의 표현 방식은 맥락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우유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니까 우유를 지금 마시고 싶고 달라는 것이구나.'

2, 3단계를 더 미루어 생각해야 하는.      

상대의 생각과 의도를 미루어 생각하는 방법은 위험할 수도 있고 흔히 하는 말로 비효율적이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우유 주세요.’라는 말에는 특별히 헤아리거나 이해야 할 수고로움이 필요치 않다.

색깔이 하나다. 그냥 우유를 주면 된다.

그런데 나는 어린 조카의 색다른 그 표현 앞에서 무장해제를 당한 느낌이었다.

뭐든 다 주어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게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우린 가끔 그 앞에 서면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지는 사람을 만난다. 찾아보면 주변에 한둘은 있다.

눈 뜨면 갈등과 스트레스의 연속일 수 있는 일상에서 그런 사람은 뜻밖의 위로를 준다.

강한 바람이 아니라 햇볕이 모자를 벗기우 듯 어린 조카의 순한 욕구 표현은 거칠어진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인간은 욕망과 욕구 덩어리다. 그리고 그 욕망과 욕구를 표현하고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 어쩌면 삶인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불가피한 타인과의 갈등들. 그것이 늘 문제다.


거창하게 확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연일 들리는 정치권의 이야기들, 사회의 갈등들. 다름이 존재하고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일 진데 그곳에서 난무하는 막말들, 각각의 욕망과 욕구에 늘 국민이란 단어를 가져다가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정직하지 못함.

품격은 고사하고 진흙 구덩이 같은 곳에서의 아우성들을 매일 듣고 있는 것은 정말 고역이다.

    

‘이거 내놔’, ‘저거 줘’가 아니라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것을 원한다. 당신이 힘들겠지만 해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렇게 말했으면 좋겠다.

품격 있는 요구와 순한 거절은 불가능한 걸까?


네버, 결코, 절대..라는 말들을 싫어한다. 그렇게 말할 만큼 나의 생각과 선택에 확신이 없을 때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 말들로 시작하는 선택들은 가끔씩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기에  나는 자주 망설인다.


덜 폭력적으로 거절하고 품위 있게 욕구를 표현하려면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선택하는 어휘를 고민하고 역지사지의 단계도 밟아야 하고 그런 수고로움을 거쳐야 한다.      


당장 내 목소리를 내야 하는, 그것도 확실하고 선명하게, 상대의 말에는 사이다 맛으로 즉시 받아쳐야 환호하는 시대.

당장 집어넣어야 하는 정보량이 너무 많아서,

1분도 길어서 15초, 30초 영상만이 소비되는 시대.      

자녀와 소통하려면 절대 길게 문자를 하면 안 되고

길게 대꾸하면 안 되고 

의도와 동기를 장황하게 설명하면 안 되고...

‘성인 자녀와 잘 지내는 꿀 팁’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강의가 대세다.


‘내가 그렇게 한 의도는 이만저만해서 그렇다’라고 말하면

‘의도는 중요하지 않아요. 의도보다 결과가 중요해요.’

라고 대꾸하는 자녀.

칼 같다. 정확하다. 하고 싶은 말을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깔끔하게 한다. 의사전달을 분명히 한다.  

   

“냉장고에 저번에 주신 것도 아직 가득이에요. 나중에 다 쓰레기 돼요.”

“엄마, 이제 나이가 드니 엄마 감각이 무뎌지나 봐. 이번 김치 엄청 짜요. 식구들이 안 먹어요, 너무 짜다고.

나트륨 많이 섭취하면 좋을 것 하나 없는데.”   

  

외동딸을 시집보내고 가까이서 육아와 살림에 도움을 주고 있는 내 지인의 딸이 엊그제 자기 엄마에게 한 말이다. 그 순간 내 지인은 눈물이 왈칵 나올 뻔했다고 했다.

웬 눈물까지?..  과장하지 말라고, 우스개로 넘겼지만 집에 오는 길 그녀의 말이 오래 생각났다.  

   

생각과 느낌, 무엇보다 원하는 것과 원치 않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 것,

거절할 것은 망설이지 말고 단호하게 거절할 것,

눈치 보지 말 것,

많은 사람이 추천하는 대화법이다.

     

무의미한 것에 감정 소모를 줄여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우리는 점점 모든 일에 습관적으로 감정을 쓰려하지 않는다. 맥락을 설명하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게 빠르고 정확하고 단호하고 신박함이 ‘선’인 시절에 느리고 섬세하고 망설이는 마음의 결은 그저 ‘루저’ 취급을 받는다.      


‘나도 우유 좋아하는데...’라고 수줍게 말하던 조카의 눈빛이 엊그제인 듯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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