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고학년인 딸은 그림을 그리거나 꾸미기를 좋아한다. 어찌나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지, 수학 문제집을 풀다가도 헤헷 웃으며 여백에 그림을 그린다. 이런 그림을 우리는 흔히 '낙서'라고 부른다. 이럴 때 왜 공부에 집중하지 않고 '딴 짓'을 하느냐고 아이를 혼낸다면 어떻게 될까?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8가지 독립적인 지능이 있다고 한다. 언어지능, 논리수학지능, 음악지능, 공간지능, 신체운동지능, 자연친화지능, 인간친화지능, 자기성찰지능.. 이렇게 8가지 독립적인 지능 중에서 사람마다 3개 정도의 강점지능이 있고, 반대로 약점지능이 있다는 것이다.
딸의 강점지능 중 하나는 바로 ‘공간지능’이다.
예를 들어 수학 문제를 풀다가도 공간지능이 높은 아이들은 순간 순간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를 떠올린다. 어쩌면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떠오르는 것이다. 떠오르는 이미지를 당장 그려보고 싶은 마음, 공간지능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를 때 옆에 있는 사람에게 그 말을 하고 싶은 것처럼, 공간지능이 높은 아이는 떠오르는 이미지를 당장 그리고 싶다. 그러다보니 책의 여백에 끄적끄적 그림을 그릴 때가 종종 있는 것이다.
공간지능이 높은 어떤 학생은 단어나 문장을 들었을 때 곧바로 마음 속에 그와 관련된 이미지가 딱 떠오른다고 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다들 그런거 아니었어요?” 공간지능이 약한 나로서는 그저 신기할 뿐이다.
며칠 전에는 딸에게 "엄마가 화장실 벽에 붙어있던 모기를 잡았어!"라고 말했더니, 딸은 '한 번 보자!'며 달려와서 꼭 자신의 눈으로 모기를 확인했다. 무엇이든 '눈으로' 보고 싶어하는 마음... 공간지능이 높은 사람들은 시각적인 정보에 민감하다. 또한 이미지를 잘 기억하고, 그림을 잘 그리고 사진이나 영상 촬영도 잘한다. 누군가의 헤어나 메이크업, 의상 스타일에도 관심이 많고, 꾸미는 것에도 일찍 관심을 보인다.
공간지능이 높은 사람은 새로운 장소에서도 지도를 보고 길을 잘 찾아다닌다. 한 번 가본 길을 잘 기억하고, 처음 가보는 대형마트의 복잡한 주차장에서도 주차한 곳을 잘 찾아낸다. 공간지능이 약한 엄마는 늘 주차한 곳을 사진으로 찍어두지만, 딸은 그 사진을 확인하기 전에 이미 주차한 곳을 기억하고 찾아낸다.
공간지능이 딸의 강점인 것은 아무래도 남편을 닮은 것 같다. 남편도 공간지능이 매우 높아서 한 번 가본 길은 10년이 지나도 정확히 기억한다. 남편은 밤에 잠이 안 오면 스마트폰 지도 앱을 켜서 온갖 나라들을 검색한다. 지금 당장 세계일주를 시켜도 잘할 것 같다. 가족여행 중에 괜찮은 카페를 찾을 때도 나는 블로그를 검색하고 글로 쓴 리뷰를 읽는데, 공간지능이 높은 남편은 구글 지도를 켜서 바닷가 뷰가 좋을 것 같은 위치를 먼저 찾고 근처에 카페가 있는지를 검색한다. 딸이 어렸을 때는 남편이 뽀로로나 폴리 등 아이가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를 스케치북에 직접 그리며 놀아주기도 했다. 공간지능이 통하는 부녀지간의 놀이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4~5년 정도 미술학원을 다니며 즐거워했던 딸이 이제는 고학년이 되어 슬슬 사회, 과학 공부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공간지능이 높은 학생들은 미술 외에도 사회 교과 중에는 지리 과목을, 과학 교과 중에는 지구과학에 흥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고등학생들 중에도 수능 모의고사에서 영어와 수학 성적은 하위권이지만 한국지리, 세계지리는 당당하게 1등급을 받는 학생들이 있다. 수능 사회탐구 응시자들 중에서 사회문화, 생활과윤리를 선택한 학생이 가장 많은 것을 고려할 때, 한국지리와 세계지리 응시자들은 대체로 공간지능이 높은 지리 마니아들이다.
이제 초등 고학년이 되어 자신의 학습방법을 찾아가야 할 때가 된 딸에게 마인드맵을 활용한 학습방법을 추천해주기도 하고, 자신만의 필기를 할 수 있도록 딸이 원하는 필기류를 사주기도 한다. 공간지능이 높은 학생들은 노트 필기도 자신만의 스타일이 담긴 형태와 색깔을 활용하는 것이 좋고, 마인드맵이나 이미지씽킹 등을 활용하여 학습 내용이 시각적으로 한눈에 보이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저 사교육을 통해 선행만 하며 진도만 나갈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점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학습 방법을 차근차근 찾아갈 수 있도록 딸을 돕고 싶다.
이렇게 공간지능이 강점인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스타일링이나 자신의 책상과 방을 꾸미는 자유를 일찍부터 주는 것이 좋다. 가족여행 중에는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을 맡겨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새로운 곳에 갈 때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켜서 아이에게 앞장서도록 기회를 주고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가는 것도 좋다. 그러면 아이의 자존감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학 문제를 풀다가 수학 문제집 여백에 낙서를 하고 있을 때, 왜 집중을 못하고 낙서나 하고 있냐고 구박하지 말고, 이렇게 말해주자. "우리 딸은 역시 공간지능이 높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