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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과외의 추억

그땐 대학생, 지금은 학부모

by 포도나무

사범대 수학교육과 재학 중에 해 본 유일한 알바는 '수학과외'였다.



검색해 보니 2000년대 초반 당시 최저시급은 2천 원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고등학생 수학 과외비는 시간당 25000원 이상이었으니.. 부자가 되고 싶었다면 그때 대학 공부가 아니라 과외를 실컷 해서 삼성전자 주식을 잔뜩 사야 했다며 지금도 종종 이야기하곤 한다.


당시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고 서울에 가족, 친척도 없었기에 과외는 주로 학과 사무실이나 같은 과 선배, 동기들에게 그때그때 소개를 받았다. 그렇다 보니 과외하러 다녔던 동네에 일관성이라고는 없었다. 방이동, 신당동, 당산역, 합정역, 홍대입구역 근처, 잠실, 반포, 압구정, 대치동 등등...


공간지능이 낮은 나는 지금도 지도를 들고 초행길에 나서면 늘 길을 헤맨다. 그런 내가 스마트폰도 없던 그 시절, 어떻게 난생처음 가보는 서울 곳곳의 집들을 헤매지 않고 찾아다녔을까.




종이 신문, 종이책 등 종이문화가 익숙하던 2천 년대 초반, 서울 지하철역 매표소 앞에는 지갑에 쏙 넣어 다닐 수 있는 미니 사이즈 종이 지하철 노선도가 있었다. 그걸 가지고 다니며 어디서 환승할지, 몇 호선 무슨 역에서 타고 내릴지를 연구하며 낯선 길을 척척 찾아다녔다.


과외를 하러 가려면 지하철 몇 호선 무슨 역, 몇 번 출구로 나와서 몇 분 정도 걸어서 직진하면 무슨 아파트가 나오고, 그 아파트 몇 동 몇 호에 찾아가면 되는 거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에게 서울은 낯설기 그지없었지만, 그나마 이렇게 숫자로 집들을 찾아다니며 수학수업을 했다. 이건 무슨 '네모의 꿈'도 아니고, '숫자의 꿈'이라고나 할까.




지하철 노선도와 아파트 동호수를 숫자로 찾아다니는 건 문제가 아니었는데, 아파트 이름이나 학교이름, 동네이름은 낯설고 어려웠다.


대치동 은마아파트, 고1 여학생 첫 수업을 하던 !




비싸고 유명한 아파트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허름한 아파트 외관에 살짝 놀랐다. (부동산 입지, 학군지에 대한 상식이 그다지 없던 시절이었다.)


"어느 고등학교에 다녀?"

"경기여고 다녀요"

"뭐? 경기여고? 경기도에 있는 학교에 다닌다고?"

"..... 네? 아닌데요?"


맙소사, 대한민국 최고 학군지에 있는 경기여고도 모르는 과외쌤이라니, 그 학생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고1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던 그 여학생은 이미 고등학교 수학 교육과정을 거의 마스터한 상태였고, 나와는 고3 수능모의고사 기출문제풀이를 했다. 당시에는 이 정도로 선행학습을 하는 이 아이가 특별한 경우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 그 정도의 선행학습을 하는 것이 특별한 게 아니라는 것을 차츰차츰 알게 되었다.




"압구정인데요, 오늘 저녁 9시부터 11시까지 시간 괜찮으세요?~~~"


압구정 현대아파트, 고2 남학생 학부모님의 전화 통화 첫마디는 항상 이랬다.


정해진 수업 시간은 주 2회 두 시간씩이었고, 학생에게 여유 시간이 생기면 이렇게 어머니께서 수학과외쌤이나 영어과외쌤에게 전화로 추가 수업을 요청하셨다. 물론 강요는 아니었고, 내가 거절하면 바로 영어과외쌤을 찾으시는 것 같았다. (늦은 시각에 수업이 끝나는 날이면 콜택시를 미리 불러주시고, 봉투에 택시비도 따로 챙겨주셨다.)


이 학생도 이미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거의 마스터한 상태였다. 학부모님이 내게 요청하신 일이라고는, 큰 접시에 가득 담긴 과일을 먹으며 학생이 문제 푸는 것을 지켜보라는 것이었다. 학생의 문제 풀이 과정을 지켜보다가 이상하게 풀면 지적해 주고 바로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2학년 이과인 이 학생은 고3 수능 모의고사 문제를 곧잘 풀었다. 이렇게 돈을 벌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다음 수업시간이었다.


지난 수업시간에 풀었던 문제 중에서 틀린 문제만 따로 복사해서 한 장 짜리 문제지로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이렇게 기특한 학생이라니...


과일 접시를 들고 들어오시는 학부모님께 학생 칭찬을 했다.


"어머, 어머니.. 00 이가 이렇게 틀린 문제를 따로 모아 문제지를 만들었네요"

"어이구, 내가 했죠. 그걸 00 이가 했으면 사람 됐게요"

"..... 아, 네~~~"


학생은 의대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별 말 없이 묵묵히 문제를 풀곤 했다. 밤 11시까지 과외선생님을 옆에 앉혀두고 수학문제를 풀다가 피곤에 지쳐 꾸벅 졸기도 하는 학생의 모습이 짠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여러 아이들을 과외수업으로 만나면서 학부모님들이 자녀 교육에 극진한 정성을 들이는 모습을 보아왔다.


어떤 고3 학생은 집에서 공부가 잘 안 된다며 집 근처에 오피스텔을 하나 따로 구해서 거기서 과외수업도 하고 혼자 공부도 하면서 지냈다. 이렇게 집 밖에 따로 오피스텔까지 구해주고 과외까지 시켜줄 수 있는 부모님이라니.. 경제력이 대단한가 보다 생각했다.


또 다른 어느 고3 학생은 자기 주도적 학습을 잘했다. 학생의 어머니는 과외 첫날에만 볼 수 있었고, 수업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학생과 대화해 보고 알아서 수업을 진행해 달라고 하셨다.


야무진 그 고3 여학생은 '수학의 정석'매주 한 단원씩 스스로 복습하면서 모르는 연습문제를 따로 표시해 뒀다가 나와의 과외 시간에 그 문제만 질문을 했다. 대체로 정해진 두 시간씩을 채워 수업을 했는데, 어느 날에는 한 시간 만에 모든 질문을 해결했다. 뭔가 시간을 채워 좀 더 수업을 해줄까 생각했는데, 학생은 궁금한 걸 다 해결해서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가셔도 돼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학생의 야무진 모습이 기특해 보이기도 했고, 또 한 번 '이렇게 돈을 벌어도 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20여 년 전에는 서울 학군지의 부잣집 아이들만 이런 사교육과 선행학습을 하는 건 줄 알았다. 내 주변에는 그런 선행학습이나 사교육 없이도 본인이 그저 열심히 해서 원하는 대학, 학과에 진학한 경우가 많았고, 내가 학군지에 거주한 것이 아니었기에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끝났다는 말을 많이들 한다. 기사를 보면 우리나라 사교육비가 29조 규모라고 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교 수학을 선행학습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익숙해졌다.




20여 년 전, 과외수업으로 만났던 그때 그 아이들은 원하던 꿈을 이루었을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또 한편으로는 그 시절, 그 학생들이 선행학습과 사교육을 그만큼 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스스로 공부해서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나 역시 예비 중학생이 된 자녀를 보며 이제 슬슬 입시에 대한 부담감을 느낀다. '될. 놈. 될'이라고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놔둬도 되는 걸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학군지로 이사를 가야 할까, 어느 학원에 레벨테스트 신청을 해야 할까 등등을 고민하게 된다.


20여 년 전, 비싼 사교육비를 매달 지출하면서 자녀교육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던 학부모님들을 보며 유별난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자녀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이나 다녔다는 맹자 어머니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예비 중학생의 엄마로서의 고민이 더욱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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