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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행성RDY Mar 12. 2024

#2 할매는 보라색이 좋대!

새벽부터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겨울치고는 추운 날씨가 아니지만, 비 오는 날의 스산함에 그냥 추운 듯 느껴지는 날이다.     

 

몇 주 전부터 코로나 키트 검사가 없어져서 면회 절차가 간단해졌다. 아무것도 아닌 듯한 코로나 검사가 부담이었나 보다. 그것 하나 없어졌다고 면회하러 가는 마음이 한결 가벼우니 말이다.    

 

“엄마 나 왔어!”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에게 빠른 걸음으로 가서 눈을 맞추며 말한다.

“왔어!”

하며 힘없이 누워있던 엄마가 두 눈 가득 반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곧이어

“할매, 나 왔어!”

하는 아이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고 손녀를 봐서 좋아하는 할매의 표정이 환하다.      


“할매, 목도리 떠 줄게. 무슨 색깔 좋아해?”     

○○야, 할매한테 색깔 보여주면서 고르라고 해.”

물병을 씻고 온 사이, 아이가 쇼핑몰에서 털실을 몇 개 보여 드렸나 보다.

“엄마, 할매가 보라색 골랐어. 할매가 보라색이 좋대. ”

하며 보여준다.   

  

왜 몰랐을까? 난 도대체 엄마에 대해 아는 게 뭘까?

그랬다. 지금 생각하니 엄마는 보라색을 좋아했었다. 지금은 입을 수도 없지만 엄마가 직접 고른 옷엔 보라색이 들어간 옷이 많았다. 엄마의 필수템 모자도 보라 계열이었고, 꽃도 진자주색 소국을 좋아했었다. 엄마가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것을 오늘 아이를 통해서 알게 되다니... 나 정말 딸이 맞나 싶다. 엄마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데 나는 엄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게 거의 없다.


미안함이 목까지 차오르는 걸 참아본다. 그러는 사이 할매랑 눈 마주치고 손 잡아주고 하는 것은 아이다. 아이의 말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난다.   

       

아이가 "요즘 할매랑 사진을 너무 안 찍었네." 하며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한다.

할매를 안고, 할매 볼에 뽀뽀를 하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하고... 할매와 함께 하는 손녀의 얼굴은 참 맑다.

이제 저 아이가 할매를 본 것이 집에서 본 시간보다 병원에서 본 세월이 더 길다. 그런데도 할매를 향한 흔들림 없는 저 아이의 마음이 고맙고 기특하지만 한편 아프다. 어느 날, 다가올 할매의 부재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할매와 한차례 사진을 찍고도 모자라는지 할매 품에 머리를 들이밀고 안긴다. 할매의 가냘픈 손이 손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이 보인다. 할매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애정표현일 것이다. 보고 있던 간병인 여사님이 "할매품에 들어가겠네." 하신다. 여사님의 눈에도 그런 아이가 기특하기도 신기하기도 한 것 같다. 어떻게 저렇게 할매를 좋아하냐고 물어보실 때가 있다.


항상 면회 시간은 감질나게 짧다. 아직 1주일에 한 번만 겨우 할 수 있는 만남인데 시간까지 제약을 받으니 늘 애가 탄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를, 손녀는 할매를 한 번이라고 더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됨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일주일 뒤를 약속하고 나오는 길에 꼭 하는 일.

엄마를 꼭 안아주며 "엄마, 사랑해.", "엄마, 고마워.", "할매, 사랑해."라고 사랑 고백을 한다. 말을 아끼는 엄마도 그때만큼은 "나도 사랑해. 고마워."라고 해 준다. 이번에는 아이가 목도리를 예쁘게 만들어 주겠노라고 잊지않고 한 번 더 강조한다.


그리고 우리는 팔을 흔들며 병실을 나선다. 할매도 불편한 팔을 들고 제대로 펴지지도 않는 손바닥으로 열심히 흔든다. 애달프다. 그래서 딸과 손녀는 최선을 다해 팔을 흔들고 웃는다. 할매의 핏기 없는 얼굴에서 희미한 웃음이 느껴진다. 차마 흔들던 팔을 내릴 수가 없다. 엄마의 팔은 내려갈 생각이 없는 듯했고, 눈빛은 우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돌아보면 여전히 딸을, 손녀를 보고 있었다. 엄마의 저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하지만 우리는 늘 그런 것처럼,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했고 그 마음을 표현했고 감사했다. 그리고 그 순간 행복했다.  


다시 우리는 일주일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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