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길온 Gilon Mar 31. 2022

녹아서 사라지는 멋진 눈사람을 보며

성장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

- 2022 광화문 글판 에세이 공모전 -

주제: 인생공부



어릴 적 눈이 펑펑 오던 어느 날, 나는 장갑과 목도리를 챙겨서 집 밖으로 나간 기억이 있다. 동네 친구들과 놀이터에 모여서 치열한 눈싸움 전쟁도 벌이고 종이컵에 담긴 뜨끈한 국물과 어묵을 먹으면서 추운 몸을 녹이다가 항상 모임의 끝은 다 같이 눈사람 만들기였다. 우리 동네 최고 멋진 눈사람을 만들기로 다짐하고 우리는 열심히 눈을 굴리며 눈사람 몸통을 만들기 시작했다. 굴리고 그다음 단단하게 뭉치고 를 반복하면서 주먹보다 작았던 눈덩이가 머리만 해지고 결국 두 손으로 껴안기 힘든 정도로 멋있는 몸통으로 까지 커졌다. 아직 가야 될 길이 절반 이상 남았지만, 점점 멋있어질 눈사람을 상상하면 우리는 너무나 뿌듯했다. 눈덩이가 커지면 커질수록 축축해지는 털장갑이 손에 감각을 점점 희미해지게 했다. 하지만, 그런 자그마한 고통이 우리의 거대한 눈사람 프로젝트 진행을 막을 수 없었다.

.


몸통이 완성되고 그다음 얼굴 부분을 위해 우리는 또 하염없이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제일 멋진 눈 사람을 만들었다. 우리의 땀과 추억이 담긴 눈사람을 담기에는 내 폴더폰 카메라 성능은 역부족이었다.

.


눈사람을 만들면서 코 훌쩍이던 초등학생 꼬마는 벌써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어김없이 매번 오는 겨울은 군 복무 중에도 예외 없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장갑과 목도리뿐만 아니라 삽과 빗자루도 추가되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예쁜 쓰레기를 보며 오와 열을 맞춘 빗자루질이 시작되었다.

.


제설이 끝나고 점심을 먹고 막사로 돌아가는 길에 식당 뒤에 만들어진 눈사람이 보였다. 동기와 같이 걸으면서 굳이 왜 저런 걸 만들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만들어진 눈사람을 보며 신나기보다는 효율을 따지는 나 자신이 보였다. 벌써 내가 동심을 잃어버린 나이가 되어버린 걸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냥 눈사람을 지나쳐왔다. 그날 저녁 불침번을 서면서 잠깐 멍 때리다 점심에 본 눈사람이 떠올랐다. 어릴 적 나한테 좋은 기억만 있었던 눈사람이 언제부터 아무런 의미 없는 눈 덩어리로 바뀌게 된 것 인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도대체 누가 눈사람을 만든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할 일이 없는 사람이길래 눈사람이나 만들고 있는지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다.

.


누가 만들었는지는 못 찾았지만 추운 겨울이 떠나고 올해도 따뜻한 봄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단순히 기온만 상승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내면에 쌓인 추운 눈도 녹고 꽃이 필 준비를 하고 있다. 당연히 그 눈 사람은 따뜻한 봄이 오기도 전에 진작 녹아서 저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벚꽃의 계절을 맞이하며 전에 본 눈사람이 다시 떠올랐다.

그 눈사람을 향한 정리되지 않은 나의 감정과 생각들이 아직도 복잡하게 얽혀있다.

.


성장은 어디서나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고 끝이 없다. 그리고 대부분은 도태되는 것보다 성장하기를 열망한다. 그 순간 내면에서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성장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어릴 적 내가 만든 멋있는 눈 사람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눈사람은 존재하기 전부터 미리 정해진 결말을 가지고 창조된다. 그 정해진 결말은 바로 시간과 기온의 변화로 인해 생긴 필연적인 용해와 소멸이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눈덩이를 굴리고 뭉치는 것과는 상관없이 점점 더 성장하는 눈 사람의 최후는 녹아서 사라지는 일뿐이다.

.


눈사람과 우리는 비슷한 결말을 공유한다. 눈사람이 아무리 멋있고 크더라고 그 끝은 소멸인 것처럼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어른과 어린이 할거 없이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 어차피 사라질 운명인 눈사람처럼 인간도 어차피 사라질 운명이니 성장은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눈사람을 만드는데 드는 노력, 시간, 그리고 그로 인해 추운 손은 결국 헛된 것이 돼버리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


우리에게 눈사람을 만들라고 강요하거나 안 만들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없다. 눈사람을 만드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우리한테는 오직 두 가지의 선택지만 주어진다. 눈 사람을 만들거나 혹은 만들지 않거나. 가만 보면 눈사람을 만드는 행동이 인생을 배워가려는 사람의 태도와 닮았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도 결코 가득 채울 수 없듯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죽음 앞에 평등하기에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향하는지 완벽히 모르고 인간의 이성의 힘으로 광활한 우주를 깨닫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자그마한 점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깰 수 없는 퀘스트로 구성된 삶이지만, 나는 오늘도 눈덩이를 굴리고 눈 사람을 만들어간다.

.


이런 모순적인 삶의 구조가 우리의 성장을 끊임없이 진행시킨다. 끝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성장의 끝도 정해져 있지 않다. 유일하게 성장이 멈추는 때는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 즉 눈 사람 만들기를 포기할 때뿐이다. 누군가는 눈사람을 만드는 나를 결국 얻는 것은 없고 맨땅에 열심히 삽질해서 손해 보는 사람이라고 놀리고 비웃을 수 있다. 그러나, 눈사람을 만들지 않기로 결정한 그 사람이 인생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


인생 공부는 결코 풀릴 수 없는 문제의 답을 구하는 것과 같다. 답이 있는지부터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풀릴 수 없다고 해서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얻는 배움의 가치는 답을 알려고 씨름한 사람들 한테만 주어지는 보상이다. 자연이 우리가 만든 눈사람을 녹게 해서 뺐어가더라도 그 눈 사람을 만들면서 생긴 우리의 추억, 감정, 그리고 깨달음까지 뺐어갈 수는 없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모순의 세계 속으로 나를 던져 답을 찾으려고 고민하다 얻은 배움을 통해 어렵지만 재밌는 인생을 배우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Life is catching wave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