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길온 Gilon Feb 23. 2022

나는 식물인간입니다.

주체성이 죽은 인간.

苦盡甘來 (고진감래).   고생이 끝나면 그 뒤에는 낙이 온다는 이 사자성어처럼 우리는 미래에 더 큰 행복을 위해 현재의 고통을 견디는 생활에 익숙하다. 과제와 시험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방학 생활은 정말 꿀 같이 좋았다.


 그러나, 달콤했던 방학은 일주일이 지나자마자 처리해야 되는 또 다른 하나의 숙제로 다가왔다. 코로나라는 환경적인 요인이 주는 제약들이 많기는 해도, 되돌아보면 코로나가 없었던 지난 방학 생활에서도 나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자유를 느껴봤음에도 그것이 자유였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수 도 있다.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여러 번 자유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엔 항상 공허함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원인불명의 지속되는 공허함이 한 가지 질문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살아있다”라는 감정은 무엇일까?  

출처: Pixabay

이 글 에서의 "살아있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기 위해 식물인간의 예를 드는 편이 좋을 듯하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A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병원에서 식물인간 판정을 받게 되었다. 교통사고로 인해 뇌가 일부 손상됐지만 다행히 뇌사가 진행되지 않아서 A 환자는 스스로 호흡이 가능하고 심장 박동도 정상이다. 하지만, 사고의 충격 때문에 환자는 더 이상 통증과 감각을 느끼지 못하고 감정이라는 것을 느끼지도, 타인과 공유할 수도 없다. 언제 깨어날지는 모른다. A는 죽은 사람인가? 부분적인 뇌손상으로 인해 생각이나 대화 같은 기능은 상실했지만, 계속해서 심장과 호흡은 정상인데 A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흔히 드라마에 나오는 설정이다. 이렇게 뻔한 예를 든 이유는 바로 식물인간만이 가지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다.



인간한테는 삶 or 죽음, 오로지 이 두 개의 선택지 밖에 없다. 죽어있지 않으면 살아있는 것이고, 살아있지 않으면 죽어있는 것이다. 무슨 말장난 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더 이상 심장이 뛰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인간은 살아있음과 살아있지 않음(죽음) 이 2가지 중 오직 한 개만 선택할 수 있다. 살아있지 않은 동시에 살아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있음"을 어느 범위에서 보느냐에 따라 살아있으면서도 살아있지 않는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생물학적 차이는 인간과 동물은 둘 다 자신의 욕구에 따라 행동하고 사고하는 생물체라는 점이다. 하지만, 사람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선과 악을 분별하려고 노력하고, 어떻게 살아야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지 고민한다. 인간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복잡한 우주의 구성과 원리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의 유무도 고민한다. 근데, 식물인간은 이러한 인간의 고유한 기능을 활용하지 못한 채 단지 숨만 유지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살아있음이라는 단어가 육체적인 그리고 생물학 범위 내에서 해석될 땐, 식물인간은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철학의 눈으로 보면 식물인간과 일반 사람은 확연히 다르다. 식물인간은 감정을 느낄 수도 이성을 통해 질문을 던지고 사색할 수 없다. 따라서, 식물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지만 철학적인 관점에서는 살아있지 않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분명히 심장이 제대로 뛰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말하기는 애매하다. 인간을 평범한 동물과 구별 짓는 이성을 쓰지 못한다면, 인간으로서 살아있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포유류의 한 종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식물인간에게는 더 재밌는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물론 광활한 우주에 비해 너무 초라한 이성을 가지고 우주를 파악하려는 것은 상당히 머리 아픈 일이지만, 식물인간한테는 이 불확실성을 해석할 수 있는 시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식물인간 예시에서 주의 깊게 봐야 되는 것은 바로 대학생 A가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서 뇌가 다쳤다는 조건이다. 이 전제조건 없이는 식물인간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외부 요인인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아도 식물인간이 된 사람이 있을까? 개인적인 견해로는 가능하다고 본다. 앞서 말했듯이, 식물인간은 이성이 없기에 철학적으로는 살아있지 않은(죽은) 존재로 볼 수 있다. 만약에 평범한 사람들이 이성을 버리고 주체적인 삶을 살지 않고, 이미 주어진 것에 순응하면서 자신을 획일화된 사회 문명의 톱니바퀴에 맞춰 삶을 산다면 과연 그들을 살아있는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이성을 소유하기를 포기하고 질문하는 것 을 멈춘 채 그저 기계적인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죽어있는 인간이다. 식물인간이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점은 바로 주체성을 잃어버린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체적이고 깨어있는 인간이 식물인간보다 더 행복한가? 주체적인 삶을 살려면 자신의 행위에 수반되는 책임을 져야 된다. 그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 오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감정 소모 그리고 불확실성으로부터 오는 불안을 견뎌 내야만 한다. 누가 더 행복할까. 아무런 고통 없이 살아있는 식물인간일까. 아니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동시에 모든 고통을 떠안은 주체적인 인간일까.



이 질문도 관점에 따라 답은 다르다. 아무런 고통이 없는 상태라는 말만 들었을 때는 식물인간도 나쁜 선택지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주체적인 인간이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불쌍해 보이기까지 한다. 식물인간의 삶과 주체적인 인간의 삶 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무엇을 고를 것 인가.



지금까지 나는 식물인간이었다. 스스로를 자신보다 더 큰 시스템에 집어넣어 그 속에서 안전함과 소속감을 느꼈다. 그 안에 있을 때는 적어도 불안하지 않았다. 해야 될 것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저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 주체적인 인간의 삶과 식물인간의 삶 중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면, 나는 선택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주체적인 삶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고통이 없는 식물인간의 삶에 너무 익숙해져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식물인간의 삶에서는 불안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함의 존재가 더욱 분명해진다는 사실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본 적이 없기에 나도 둘 중의 삶 중 어떤 것이 더 나은지 모르겠다. 근데, 식물인간의 삶에서 공허함이 계속해서 없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주체적인 삶을 살아보기 위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모험을 떠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모험을 떠나고 나면, 이 글이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