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문어발은 교사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부모님과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의 직업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의외다.
공부를 아주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고, 앞에 나서는 것엔 누구보다 젬병이었는데 교사라니.
암만 생각해도 당시 우리 가족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선하면서도 안정적이고 가장 현실적인 직업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다행히도 적성에 맞았고 20년 간 꽤 괜찮은 교사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학교밖 나의 모습을 보고 누구도 교사를 상상하지 않는다.
그렇다. 나는 교사라는 직업에 꽤 만족하면서도 틈틈이 벗어나려 한다.
아마 내재된 지랄 같은 성격과 혼자만이 아는(지금은 남편도 아는) 충만한 똘끼 때문이라 짐작해 본다.
나의 첫 교사생활은 어느 관광 중소도시에 있는 학교에서 시작됐다. 첫 해를 제외하면 내리 고3 담임으로 지내면서 참 많은 추억을 쌓았다. 지금 떠올려보면 낯부끄러운 기억도 많았는데, 당시 어리숙하고 철없는 내 모습을 환대해 준 똑같이 철없던 소녀들.
지금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나와 똑같은 40대를 맞이하고 있는 나의 첫 제자들이다.
나의 첫 제자이자 반장이었던 유정이. 지금도 황실장이라고 내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다. 얼마 전 황실장으로 뜨는 전화를 받고 어찌나 반갑게 옛 추억을 떠올리며 수다를 떨었는지.
한 번은 우리 반에서 극심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던 당시 나의 큰 걱정거리였던 한 여학생이 있었다. 함께 산책을 하며 진지하게 상담을 하고 있는데, 휴가 온 젊은 대학생들이 우리 둘에게 헌팅을 해오는 바람에 산통이 깨졌다. 담임교사와 학생이라고 아무리 얘기를 해줘도 뻥치지 말라며, 싫으면 싫다고 하라던 그 청년들. 그때는 화딱지가 났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마운 청년들이다.
그 학생과는 그날의 일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며 배꼽 잡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으로, 한 가정의 와이프로 잘 살아가고 있는 늘 생각나는 제자다.
초임이었기에 두려웠다. 아이들이 싫어할까 봐. 인기 없을까 봐. 옆반 담임보다 못할까 봐.
매일매일 교재 연구보다 더 열심히 학생들을 웃겨줄 신박한 썰을 떠올리고 구상하느라 진이 빠졌다.
거기에 꽉 찬 야자감독과 보충수업으로 결국 발령 2년 차에 폐결핵에 걸렸다. 물론 관광 지역 특성상 과도한 음주회식도 한몫했으리라 생각한다.
살이 쏙 빠진 채 두 번째 학교로 옮겨간 후에도 전적 때문인지 나의 고3담임 생활은 계속되었다.
전국 최고의 작은 학교로 뽑히고도 남을 시골 고등학교에 근무하게 되면서, 교사로서의 이색 경험치는 더욱 쌓여갔다.
동네 어린이집 봉고차를 대여해서 단체로 대학 면접시험을 보러 다니는 경험을 어느 교사가 해봤을까.
후진할 때마다 울려 퍼지던 '엘리제를 위하여'는 아직도 귀에 선하다. 창피하다고 제발 후진 좀 하지 말라고 뜯어말리던 아이들.
첫 방문 길에 가도 가도 보이지 않아 세 번은 족히 전화하게 만들었던 그 시골학교의 아이들은 나를 넘치게 환영해 주고 사랑해 주었다.
'나만 바라봐'를 인생 처음으로 경험하게 해 준 그 아이들의 눈망울과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학교 관사에서 지내던 내가 주말에 본가로 올라갈 때는 나 몰래 차키를 가져다가 트렁크에 고사리니 배추를 실어 놓던 녀석들.
어쩐지 운전대가 무거워 트렁크를 열어보고는 가득 쌓여있는 배추 때문에 기겁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 엄마는 참 좋아라 하셨다. 딸이 선생이어서인지 배추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를 떠올려 보면, 참 어설픈 교사였다.
어쭙잖게 반 기강을 잡겠다고 무서운 표정으로 소리치고, 혼내고, 정색하고, 혼자 삐치기까지.
그 어설프고 때론 비합리적이었던 내 모습을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이라고 온전히 다 받아낸 아이들.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누가 누굴 가르쳐. 똑같은 철부지였으면서.
다행 인즉은 그 당시 빡센 학교 분위기에 억눌려 앵무새처럼 빡센 선생 역할에 빠져 있었음에도
아이들을 정말 사랑했다.
의무감이 아니라 진짜 그 아이의 일상이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고, 몸이든 마음이든 아프지 않기를 바랐고, 잘 크기를 응원했다. 진심이었다.
한 번은 매일 지각하는 우리 반 남자아이 때문에 제대로 성질이 났다. 어설프게 둘러대는 그 아이의 사정이 너무 궁금해 방과 후에 함께 집으로 걸어갔다. 요즘 젊은 교사들은 말로만 듣던 가정방문이다. 논, 밭을 가로질러 족히 한 시간은 걸려 산꼭대기에 있는 그 아이의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동안의 타박을 사과했다.
홀로 손주를 키우고 있는 아이의 할머니께서 갑작스레 찾아온 담임을 버선발로 맞아 주시며 다급하게 건네주신 그 주스 한 컵이 그렇게 민망하고 죄송스러웠다.
담임 성화에 야간 자율학습까지 마치고 가로등 하나 없는 그 길을 따라 한 시간을 걸어갔을 아이의 뒷모습이, 논밭을 철퍼덕 가로지르던 그 두 발이 계속 떠올라 한동안 괴로워했다. 뭣이 중헌디.
땡땡이 칠 데라고는 어차피 학교 운동장 밖에 없는데, 그걸 한 번 봐주지 않고 교실로 꾸역꾸역 불러 앉혀 자습을 시키던 지독한 담임. 그게 나였다.
그렇게 철이 덜든 상태로 뭐가 진짜고 가짜인지 구분도 잘 못하면서 다 아는 것 마냥 아이들을 진지하게 가르쳤다. 아이들도 그런 나를 세상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사람마냥 믿고 따라 주었다.
남들이 보면 어설프겠지만 우리는 서로 그렇게 의지하며 함께 성장했고, 나의 20대 교사 생활이 싸이월드에 가득 찬 사진첩과 함께 서서히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