맙소사! 냄비 바닥이 떨어졌어

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by 마이드림

누군가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간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어요.

사람들은 오며 가며 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나를 선택해주진 않았답니다.



그녀가 내 앞에 멈추어 섰을 때도

다른 사람들의 반응과 다르지 않았어요.

"깔끔하고 귀엽긴 한데, 너무 싸서

금방 못쓰게 되는 거 아냐?"라고 하더군요.


너무 저렴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일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그 눈빛을 보면서,

반드시 보여주고 싶었어요.

내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를 말이에요.


나를 보며 고민하던 그녀는

"좀 사용해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버리고 좋은 걸로 다시 사지 뭐.

가격이 싸서 부담이 없으니 다행이잖아."

라며 나를 집어 들더라고요.


나는 너무 기분이 나빴어요.

아직 나를 사용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버릴 생각부터 먼저 하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요.


우리의 처음 만남은 그렇게

자존심 팍팍 구겨지는 말을 들으면서

시작되었어요.



아, 내 소개가 늦었네요.

그녀가 의심 가득한 얼굴로 데려온 나는

작은 냄비랍니다.

그녀가 나를 선택하던 순간부터

내 역할은 이미 정해져 있었어요.

계란 삶기 전용 냄비가 되었죠.


난 꼭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었어요.

일단 계란부터 잘 삶아내서

내가 괜찮은 냄비라는 것을 보여주리라

다짐했었죠.


내가 바닥이 좀 얇아서

물이 빨리 끓는 장점이 있거든요.

거기다 몸 자체도 가벼우니까

들고 옮기기에도 편하고요.

계란 삶기 전용 냄비가 되고 나서

후딱후딱 빨리 일을 해내니까

그녀의 눈빛이 바뀌더라고요.


의심이 가득하던 그녀의 눈빛 때문에

오래 버텨야겠구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나한테 얼마나 기대를 안 했으면

"물 빨리 끓어서 진짜 좋다!"면서

생각보다 더 쉽게 인정을 받았지 뭐예요.


첫 만남의 기억이 좋지 않았던 거에 비해

이 집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어요.

계란 삶기 전담을 하니까

내 역할이 분명한 것도 마음에 들었고,

계란 삶기가 내 적성에도 맞더라고요.

그렇게 꽤 오랫동안 잘 지냈답니다.



내 마음의 평온이 깨진 것은

지나치게 더운 날씨 때문이었어요.

인간들만 더위에 지친다는 편견을 버리세요.


가스불은 내 밑에서 뜨겁게 달구고,

삶아지는 계란은 뜨거워진 몸으로

내 안의 열기를 더하는 데다,

날씨까지 숨 못 쉬게 더워봐요.

안이나 밖이나 뜨거움으로 둘러싸이면

냄비인 나도 힘들답니다.


내가 매장에 진열되어 있었을 때는

날씨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일상 냄비 생활에 접어드니까

직접 닿는 불과 끓는 물이 말도 못 하게 뜨겁네요.


나는 지금 너무 지쳐서

이 더위가 물러가기 전까지는

계란 삶기도 좀 쉬고 싶었답니다.


내가 요즘에 제일 부러운 친구들은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 반찬통들이에요.

걔들은 불 위에 올라가지 않아도 되고

시원해서 좋을 텐데, 나는 이게 뭐야.

너무 덥고 뜨거워요!



그녀는 요즘 덥다고 불 옆에

잠시도 서있기 싫대요.

타이머에 맞춰서 가까이 온답니다.

오늘따라 타이머 지정 벨 소리가

들리질 않았어요.


어... 어...? 이러면 안 되거든요.

원래도 다른 냄비보다 빨리 끓는데

이렇게 계속 불 위에 얹어두면 어쩝니까.


그녀가 방에서 빨리 나오지 않으니까

힘들어진 나는 심호흡을 해보았어요.

"후... 하... 후... 하... 아... 뜨거워!!!

도저히 못 참겠어요."


심호흡을 해봐도 소용이 없고

으... 온몸이 열로 불타오르다

뜨거운 열에 녹아버릴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더라고요.


바닥이 얇아서 물이 빨리 끓는다고

내 입으로 말했었던 장점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최악이에요.

물이 너무 뜨거워서 괴롭단 말이에요.


나 정말 어떡해요?

그녀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있는데

이대로 계속 물만 끓이고 있으라고요?

아, 어떡해요. 물이 끓고 끓다가

이젠 줄어들기 시작하고 있는걸요.


"계란은 도대체 언제 넣을 거예요?

나더러 계란 삶기 전용 냄비라면서요.

그래놓고 왜 나를 이렇게

통 냄비 구이를 만들고 있는 건데요?"


오늘은 정말 타이머 설정을 안 해두었는지

항상 들려오던 멜로디도 들리질 않아요.

나 정말 이렇게 계속 그을리다가

냄비의 생을 마감하게 되면 어쩌죠?



어쩌면 주방에 전해지던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요.

주방 친구들이 내게 그랬거든요.

타이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냄비인 내게는

아주 위험한 날이래요.


그녀는 평소에는 집중력이 약하다는데

무슨 일인지 냄비를 불 위에 올려놓은 날은

전에 없던 집중력이 발휘된다지 뭐예요.

냄비 끓고 있는 건 깜빡하고 책상 앞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나 뭐라나.


그러다 냄비를 홀라당 태워먹을 뻔해서

그때 받은 충격으로 꼭 타이머를 맞춰두는 것이

습관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녀의 집중력은 참 위험하기도 하지!


"근데 진짜 왜 안 나와요?

내가 폭염 상황만 아니면 참아보겠는데,

이렇게 건물까지 숨 막히게 무더운 날에

불 위에 나를 두고 안 나오는 건 너무 한 거 아닌가요.

나한테 도대체 왜 그래요?"


내가 계속 시끄럽게 떠들어서인지

다행히 그녀가 방에서 나오긴 했지요.

"아이고, 물을 다시 끓여야겠네."


그녀는 내게 줄어든 물을 부어주고

조금 뒤에 계란도 넣어주고

타이머까지 맞춘 후에 방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그녀가 방으로 들어간 후에

아까부터 상태가 좋지 않던 내 몸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계란이 삶아지고 있는 중이었는데요.

내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계속 났어요.

타닥... 뻑... 쩍... 타닥...

이런 소리들이 계속 나더라고요.

불에 강렬하게 달궈지는 것을

내 몸이 견뎌내질 못하고 부서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물이 끓을수록 몸이 더 무거워지고

바닥에는 강렬한 통증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너무 이상했어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런 느낌은 정말 처음이에요.

왜 몸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지는 걸까요.


아까 물이 줄어들 만큼 가열되었을 때

뜨거운 열로 그을렸던 후유증인 걸까요?


이렇게 아픈 날이 처음이라 당황했어요.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도 안 됐고요.

그런 와중에도 계란을 잘 삶겠다는

책임감은 다하고 있었답니다.


드디어 계란이 다 삶아졌어요.

어느새 뜨거운 열병을 다 앓은 듯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끝나 있었고,

뭔지 모르게 내 몸이 좀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어요.

이 느낌은 뭐지? 뭔가 쑥 빠져나간 기분이었죠.

처음 경험해 보는 느낌이었어요.



그녀가 삶은 계란을 찬물에 담그기 위해

냄비인 나를 들어 올렸을 때

저쪽에 뭔가 신기한 것을 보았어요.

가스레인지에 떨어져 있는 내 몸의 조각을 말이에요.

나의 밑바닥을 감싸고 있던 부분이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답니다.


"맙소사! 냄비 바닥이 떨어졌어!!!"

그녀가 놀라서 소리쳤어요.


믿을 수가 없었어요.

이게 정말 나한테 일어난 일이 맞아요?

타닥 쩍 하던 소리가

내 몸이 분리되는 소리였던가 봐요.


비싼 냄비는 요리하다 좀 태워도

쓱싹쓱싹 닦으면 그을음도 다 지워지고

멀쩡한 걸 봤었거든요.

나의 넘치던 자신감과는 별개로

내 몸이 분리되어 버린 건,

내가 가격이 싼 냄비이기 때문인 걸까요.

그래서 처음부터 단단함이 부족하게

만들어진 때문인 걸까요.


나도 미처 몰랐어요.

내가 이렇게 허약 체질 냄비인 줄은!


냄비는 일단 바닥이 튼튼해야 하는데

이렇게 바닥이 부실하다니!

정말 냄비 체면이 말이 아니랍니다.

너무 속상하고 자존심 상해서

엉엉 울음이 나왔어요.



우리 처음 만나던 날부터

버린다는 말을 쉽게 하던 그녀였기에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진 나를 보면

"내가 이럴 줄 알았다"면서

내다 버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더욱 울음이 멈추질 않았죠.


그런데요.

뜻밖에도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요.


"냄비야! 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아.

정말 약한 냄비였다면 바닥에

구멍이 뚫렸을지도 모르잖니.

그런데 이중바닥이더라.

바닥이 떼어지면서도 계란을 무사히

삶아내는 냄비였지.

처음부터 너를 조심히 아꼈더라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정말 미안해."


그녀는 내게 사과했고

나를 인정하며 엄지 척을 해주었어요.


바닥이 한 겹 떨어져 버린 나는,

이제 냄비로 활약하기에는 위험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이제 어떡하나" 고민이 깊을 때

그녀가 말했어요.

"떨어져 나간 동그란 받침 부분은

냄비받침으로 사용해 볼까."


오~마음에 드는 생각이에요.

나 이제부터 냄비받침으로의 삶을

시작해보려고 해요.

뜨거움에 단련되어 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냄비받침이 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냄비들아! 기다려라.

이제는 냄비받침인 내가 간다."



[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1(30화)]에 이어,

[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2(30화)]를

다 채우는 날이 왔네요.

1권 때는 인사를 전혀 못 드려서

2권 채우는 날에는 인사를 드려야지

생각했었거든요.

60 편의 스토리들이 채워지는 동안

단 한 편이라도 읽어주시고

다정한 댓글을 남겨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충격냄비바닥떨어지다.jpg


이전 29화깨끗한 행복을 선물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