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행복을 선물할게요

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by 마이드림

"어? 얘가 왜 이래?

왜 아예 작동을 안 하지?"


주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전원 버튼만 계속 껐다 켰다를 반복합니다.

몇 번을 해봐도 안 되니까

슬슬 짜증이 올라오는 모양입니다.

코드도 뽑았다 꽂았다 해보더니

나를 이쪽저쪽으로 막 흔들기까지 하지 뭐예요.


"그만 그만! 어지럽단 말이에요.

흔들려서 멀미 날 거 같으니까 그만해요."


내가 아무리 소리치면 뭐 하나요.

지금 주인은 내 어지러운 상태보다

왜 작동을 안 하는지에만 정신이 팔려있는걸요.

주인의 표정을 보면서 너무 속상했어요.


나는 세탁기!


내가 주인의 깨끗한 삶을 위해

열심히 일한 세월이 몇 년인데,

고작 몇 분 동안 작동이 안 된다고

짜증 가득한 얼굴을 보여주냔 말이에요.

어떤 날은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일을

몇 번씩 나눠가면서 시켜서 힘들었어요.

그런데도 불평 한마디 안 하고 일했다고요.


나는 시간도 칼같이 잘 지켰어요.

시간 딱딱 맞춰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열심히 일해왔던 나인데,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 게 너무하단 말입니다.


내가 좀 상태가 이상하면

"너 괜찮니?"라고 걱정부터 해주는 게

주인의 도리 아니에요?


그런데 이 나쁜 주인이 그랬어요.

"얘가 15년도 넘게 썼다고 고장 났나?

A/S 불러야 되는 건가? 귀찮아 죽겠네.

고칠 수도 없다면 새거 사야 할 텐데

또 돈 들어갈 일이 생겼구먼."


와, 이 주인 말하는 것 좀 보세요.

이래서 인간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면 안 돼요.

내가 잠시 작동 안 한다고

벌써 새거 살 궁리까지 하다뇨.

내 문제가 뭔지도 아직 모르면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내가 이때까지 주인의 청결한 삶을 위해

열심히 물살 휘저어가면서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일해온 날들이 후회되고

주인도 너무 미웠어요.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뭔지 아세요?

나의 세탁기 삶을 통틀어 처음으로

인간의 손에 찰싹찰싹 얻어맞기까지 한 거 있죠.


심한 기계치인 주인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더러 접촉불량이래요.

두들겨주면 다시 될지도 모른다면서

손바닥으로 자꾸만 옆구리를 치지 뭐예요.

왜 자꾸 때리냐고요. 엉엉...


"나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 버릴 거야!

내가 만들어지기 이전으로 날 다시 보내줘요.

내가 진짜 이런 대접받고는 못 살겠어요."


주인은 주인대로 왜 안되냐고 짜증,

나는 상처받아 말 안 되는 넋두리를 하면서

그렇게 각자의 이야기만 하고 있었죠.


그러다 나는 결심했어요.

"에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어라."

이제 주인에게서 마음을 거두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요.

주인이 나를 보더니 그러잖아요.

"있잖아. 사실 나는...

손에 익숙한 너랑 헤어지기 싫어.

도대체 이유가 뭐야?

너 정말 고장 난 거니?"


그 말을 들으니까 내 마음이 약해졌죠.

속이 타서 동동거리는 주인에게

말해주고 싶더라고요.


"사실 나 고장 난 거 아니에요.

A/S도 부를 필요 없다고요."


우리 사이에 소통번역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는 오래된 옛날 모델이라 못하지만

앞으로의 세상에선 우리 세탁기들도

인간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멈춤의 원인도 간단한 문제였답니다.

"수도꼭지 부분을 살펴보세요"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답답했어요.


나의 안타까운 마음과 외침이

주인에게 직접 닿지 못했음에도

주인은 내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지요.


주인은 드디어 뭔가 생각이 난 듯이

수도꼭지를 돌려보기 시작했어요.


"아... 맞다! 이거야 이거!!!

내가 저번에 수도꼭지를 돌려봤었어.

그래서 잠겨있었던 거구나."


이유를 알게 된 주인은 너무 기뻐 보였어요.

드디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네요.


성질 급한 우리 주인은요.

당황하면 도무지 침착함이라곤 없어요.

뭔 일만 생기면 허둥대는데,

내가 목소리만 있다면 주인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니까요.


주인의 말 때문에 섭섭해서 토라졌다가도

주인의 말 몇 마디에 금방 수그러드는 나는

너무 마음이 약한 세탁기네요.

정든 세월이 있으니까요.


내가 깨끗하게 세탁해 준 빨래들을 꺼내면서

개운해하는 주인의 표정을 보는 게 좋았어요.

"깨끗한 행복을 선물해 줄게요"라는 마음이

나를 보람 있게 만들어 주는 것도 좋았어요.

나는 인간들의 청결 행복지수를 높이는데

이바지하고 있는 자부심이 강한 세탁기거든요.


오늘은 비록 고장 해프닝을 겪긴 했지만

빨래를 하고 나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요.

더러움을 씻어내는 일을 하는

나의 장점을 살려,

주인이 내게 했던 예쁘지 않은 말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들도

재빨리 씻어내고 잊어줄 수 있었답니다.


대신 이번 한 번 만이에요.

만약 다음에 또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쉽게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땐 진짜 동작을 멈춰버릴 거예요. 알았죠?




세탁기화났다-2.jpg


이전 28화부추에겐 초록초록한 꿈이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