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주신 성을 바꾸던 날
요즘은 미국에서도 결혼 후 성을 바꾸는 일들이 많지 않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젊은 사람들은 결혼 전 부모님이 주신 성을 유지하는 경우도 다반사.
하지만 의외로 군대라는 집단은 제법 보수적이라 결혼 후 성을 바꾸지 않은 채, 부대 내의 병원이나 학교를 가게 되면 의심어린 시선을 느낄 때가 많았다.
결혼 후 만 6년이 되던 해.
나는 넷째를 임신하고 있었고, 남편은 해외 파병으로 집을 떠나 있었다.
그리고 미루고 미루던 그 일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바로 시민권을 신청하며 부모님이 주신 성을 남편의 성을 따라 바꾸는 것이다.
정말 고민이 많았고 알 수 없는 상실감도 밀려왔다.
기왕 미국에서 살게 되었으니 First name이나 Middle name에 영어이름을 넣으면 어떻겠냐는 남편의 권유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부모님이 물려주신 내 성을 남편의 성으로 갈아끼워야한다는 상실감에 집중이 되어있던 시절인 듯 했다.
어차피 여권에 기재되어있던 잘못된 영어 스펠링을 바꿔야했던 찰나이기도 했다. 이름 스펠링을 수정하며 성까지 바꾸자던 남편의 제안을 처음엔 거절했다. 헌데 큰 아이가 킨더에 들어가며 내 서류상의 성이 Lee 여도 나는 종종 Mrs. Kim으로 불리게 되었다. 사실 난 별로 불편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남편이 난리였다. 시민권을 할 때 이름 스펠링을 수정하고 성을 바꿔야 따로 돈이 들지 않는다며 남편은 몇년을 들여 날 설득했다.
어차피 지속적으로 불려야할 Mrs.Kim 이고 Family Name에 Kim 을 써야한다며 서류상의 성을 Kim으로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부모님이 주신 성을 아예 빼버리라는 남편과 그래도 중간이름으로 유지하고 싶다는 나의 의견이 다시 부딛혔다. 미국에서 살아야하는데 중간이름에 영어이름을 넣어야 편하지 않겠냐는 남편의 말에 난 울컥 했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부모님이 주신 내 성을 중간이름으로 유지하고 싶었던 건, 내 뿌리에 대한 고집이었던 것 같다. 사람이 살면서 성을 바꿀 기회가 몇번이나 될까? 연예인이 된다거나 특별한 이유로 개명을 하지 않는 이상, 행여 개명을 한다 해도 보통 성은 유지하고 이름을 바꾸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고, 연예인이 되어 가명을 쓴다 해도 법적 서류상의 성은 바뀌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난 서류상의 성을 바꿔야하는 것이다. 내 부모님의 성을 중간이름으로 유지하는 건, 내 부모와 한국에 있는 내 가족들과의 간격 유지와 나의 정체성까지 붙들게 된다는 의미였다.
결국 성을 바꾸게 되고 중간이름으로 부모님이 물려주신 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미국 사회에서 일하게 된 지금, 난 공식적으로도 서류상으로도 Mrs.Kim이라고 불리운다. 하지만 성을 바꾸기 전 만났던 사람들은 아직도 이전에 사용하던 성으로 날 부르곤 한다. 이도 저도 아닌 이 기분은 뭘까?
이씨도 아니고 김씨도 아닌.....그저 이름만 남은 기분.
이제 아주 가끔 부모님이 주신 성으로 불리우게 되면 아련한 느낌이 밀려온다.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내가 서로 타임슬립을 하게 되는 느낌?
평소엔 잊고 살던 한국에서의 내가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런 묘한 기분에 휩쌓인다.
그래도 부모님이 주신 성을 중간이름으로 유지하길 잘했다 싶다. 그게 뭐 별거인가 싶겠지만, 그 것이 주는 알 수 없는 힘으로 또 하루를 이 곳에서 살아내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