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넷 엄마, 발목이 부러지다
12월 9일 목요일.
아이들 셋은 학교에 가있고 넷째를 유치원에 내려놓았다.
넷째가 유치원에 가있는 매주 화, 목 2시간 반.
이 또한 매일 찾아오는 휴식이 아니기에 아이를 보내고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를 늘 궁리하게 된다.
장을 볼 수도 있고 집에 돌아와 잠시 쉼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이 날은 왠지 운동을 하러 가고 싶었다.
그동안 켜켜이 쌓여왔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어떤 운동을 해야 하나 며칠을 고민했다.
아이가 너무 짧은 시간 동안 유치원에 가 있기 때문에 이동시간까지 고려하면 그 사이에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수영을 하러 갔었겠지만
왠지 이 날은 속도감을 느끼고 싶었다.
물속에서 느끼는 자유로움도 있지만
아이스 링크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미끄러짐에서 오는 해방감을 느끼고 싶었다.
아무래도 나는 중력에 저항하거나 중력을 차단하는 운동을 즐기나 보다.
마침 목요일 아침, 아이스링크장이 자유 스케이팅 시간이어서 막내를 유치원에 내려준 후 큰 아이가 잠시 스케이트를 배웠던 링크로 갔다.
스케이트를 빌린 후 착용하고 잠시 몸을 풀었다.
나 이외에도 5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백인 아주머니가 몸을 풀고 계셨다.
스케이트 링크에 혼자 온 것은 처음이었어서 조금 어색했지만 링크에 발을 올려놓자 그 어색함은 이내 사라졌다.
스케이트를 썩 잘 타는 편은 아니었지만 얼음 위를 미끄러지며 바람이 몸을 가르는 느낌은 즐기는 편이었다.
천천히 스케이트를 밀며 그 공간과 시간을 즐겼다. 사 남매에게서 벗어나 유일하게 나만을 위해 집중하는 시간이 너무 귀했다.
나와 함께 링크에 올라선 백인 아주머니는 턴, 점프 등 피겨 동작들을 연습하셨다.
아무래도 소싯적 스케이트를 배우셨던 분이었나보다.
올해 한국 나이로 40이 된 나.
이제 와서 배우는 건 늦은 건가? 싶으면서도
그래도 내 운동신경이 있는데 피겨 선수까지는 될 수 없어도 작품 하나를 마스터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덧 아이스링크에는 한 사람이 더 들어와 있었다.
아까 그 아주머니보다도 연세가 더 있어 보이시는 아저씨.
50대 후반에서 60대 초 정도 돼 보였다.
(외국인들이 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처럼 나도 그들의 나이를 가늠하기가 참 어렵다.)
백인 아주머니가 하얗고 예쁜 피겨용 스케이트를 신으셨었다면
이 아저씨는 짙은 회색의 하키 스케이트를 신으셨다.
아무 기술 없이 천천히 링크만 돌고 있는 나를 힐끔 보시더니 본인의 멋진 기술들을 연습하기 시작하셨다.
한쪽에선 피겨 기술, 또 다른 한쪽에선 하키 기술을 연습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꼭 스케이트 레슨을 받아서 피겨 꿈나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30분 정도 스케이트를 탔는데 오른발 안쪽 복숭아뼈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스케이트 신발에 살이 쓸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양말도 두꺼운 걸 신고 왔는데 왜 이리 발목이 쓸릴까.
신발과 양말을 재정비하기 위해 링크 밖으로 천천히 나가려 방향을 돌렸다.
‘왜 이렇게 아프지….?’
라고 생각하며 오른쪽 발가락을 꿈지럭 움직이는 순간.
바로 그 순간 사건이 벌어졌다.
어!!!!
우두득
쿵!!!
발가락을 꿈지럭하다가 스케이트가 살짝 들리고
살짝 파여있던 얼음에 오른쪽 스케이트 앞 날이 박히면서 그대로 넘어진 것이다.
문제는 스케이트가 빠지면서 넘어진 게 아니고 박힌 채 그대로 고꾸러져버린 것.
넘어지며 발목에 큰 울림이 생겼다. 뼈가 뻐근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발목이 제대로 꺾인 것 같았다.
무용을 하고 토슈즈를 신으며 발가락과 발목 꺾기를 지속적으로 해주었었는데 그때의 뻐근함보다 1인치 정도 더 간듯한 뻐근함이었다.
넘어지며 발목에서 우두득하는 소리가 났다.
어라, 분명 다리에서 난 소린데 왜 내 귀에서 울리는 거지.
발목이 얼얼했다.
발가락을 움직여보니 발가락은 움직일 수가 있었다.
심하게 아프지 않았기에 잠시 쉬었다 일어나려 했는데
저 멀리서 멋지게 하키 기술을 연습하시던 아저씨가 번개같이 달려오셨다.
“괜찮아? 너 제법 심하게 넘어졌는데.”
“괜찮아요.”
“일어날 수 있겠니? 내가 부축해줄까?”
그 아저씨는 매너남이었다.
발목을 확인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링크에서 벗어버린 한쪽 스케이트까지 들어주시고 한 팔은 내가 기댈 수 있도록 내어주셨다.
그 아저씨의 팔에 의지해서 천천히 링크를 빠져나오는데
발이 저려왔다.
“딛일 수 있겠어? 심각한 부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너 스케이트 탄지는 어느 정도 된 거야? 제법 잘 타던데?”
이것저것 물으시던 아저씨는 카운터에서 아이스팩까지 얻어다 주셨다.
다리의 얼얼한 감각 이외에 별다른 통증은 없었다.
앉아서 아이스팩을 데고 조금 쉬며 마사지를 해주고 발가락을 움직여보았을 때 별 문제가 없어 보였으나
더 이상 스케이트를 탈 수 없겠다는 판단에 신발을 신고 발을 땅에 디뎠다.
아….
걸을 수가 없었다.
발을 땅에 디디자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뭔가 잘못됐구나.
단지 발목을 접질린 게 아닐 수도 있겠구나.
빨리 회복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남겨주시는 아저씨를 뒤로하고 나는 한 발로 콩콩 뛰어 아이스링크장을 빠져나와
차로 갔다.
다시 한번 더 발을 디뎌 보았으나 디딜 수 없었다.
통증이 점점 밀려왔다.
마침 차에 있던 진통제 두 알을 먹은 후, 잠시 생각에 빠졌다.
목요일.
무용학원 수업 있는 날.
아. 수업을 하러 가는 날이었구나.(나는 어린이들에게 발레를 가르치는 무용학원 강사이다)
바로 원장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얼마나 다쳤는지 몰랐던 나도 원장님도 이 날의 결근이 그저 하루로 끝날 줄 믿고 있었다.
너무 감사하게도 원장님이 대체 수업을 해주신다고 하셨다.
자 이제 운전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해볼 차례였다.
다친 발은 하필 오른발이었다.
오른발목이 자유롭게 움직여지지가 않았기에 왼발로 브레이크를 밟고 오른발로 액셀을 밟아보았다.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다리 전체를 들어서 엑셀을 조절했다. 왼발로 밟는 브레이크는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했다.
점점 더 다리에 통증이 밀려왔지만
넷째 아이를 나 대신 데리고 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서둘러 아이 유치원 앞으로 갔다.
아이를 픽업한 후 바로 어전 케어에 갔다.
미국은 응급실 이외의 대부분의 병원을 예약하고 가야 하지만 어전 케어는 가벼운 증상으로 급하게 병원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예약을 요구하지 않는 병원들이다.
첫째가 폐렴에 걸려 어전 케어를 갔을 때 그곳에서 엑스레이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엑스레이를 찍어 뼈 상태를 봐야 할 것 같았다.
차에 타고 내릴 때 늘 내게 안기거나 업혀 탔던 막내.
여느 때와 달리 나에게 안아달라 손을 뻗었으나 엄마가 안아줄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 것인지
이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만 3살짜리도 깨달은 것인지
보챔 한번 없이 병원에 잘 따라가 주었다.
들어가서 접수하고 5분가량 기다리자 간호자가 휠체어를 가지고 나를 데리러 와주었다.
간단한 사고 경위를 이야기한 후 바로 엑스레이실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의사를 기다리는 동안 간호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표정이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잠시 후 의사가 들어왔다. 한국계열 의사분이셨다.
내 영어가 불편한걸 눈치채셨는지,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엑스레이를 살펴보며 의사가 말했다.
“발목이 부러지셨네요. 수술하셔야 할 수도 있으실 거 같아요. 정형외과 예약해서 바로 의사 보셔야 하고요, 지금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차 대신 운전해주실 분 부르세요. 지금부터 운전하시면 안 돼요.”
부러졌다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절망적이지도 않았다.
말을 잃었다.
땡스기빙과 블랙프라이데이를 기준으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남편은
타 주에 있는 사업장에 가서 일주일에 하루 겨우 올까 말까 이고
아이들은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어 내가 운전을 하지 않는 다면 학교조차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수술이라니.
수술하러 가 있는 동안 아이들을 봐줄 사람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수술 후 나를 데리러 올 보호자조차도 내 곁에는 없었다.
당장 걸을 수 없는 나에게 어전 케어에서는 목발을 주었다.
그 목발에 의지해 막내를 데리고 걸어 나오는데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져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우선 병원을 나와 집에 가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친한 지인들은 다들 집에서 너무 멀리 살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일을 빼고 나에게 와달라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고 점점 통증이 심해지는 다리로 다시 운전을 해서 집에 갈 수도 없는 노릇.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옆집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나마 동네에서 가장 가까이 지내는 이웃이었다.
짧은 영어로 대충 상황을 설명하자 15분쯤 후,
재택을 하던 남편과 함께 부부가 병원 앞으로 와주었다.
(이 은혜는 잊지 못할 예정)
그 부부의 도움으로 감사하게도 나와 막내는 오후 2시 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다시 시작되었다.
나머지 세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다.
우선,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집에서 40분 거리, 왕복 1시간 20분이었다.
내가 운전할 수도 없고 옆집 사람에게 부탁하자니 너무 미안하고,
결국 우버를 불렀다.
우선 학교에 전화해 또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이들을 조금 늦게 픽업하게 될 것 같다고 말하였다.
아이들이 놀라지 않도록 아이들에게도 설명을 좀 해달라고 했다.
우버를 부른 후, 막내는 다시 옆집에 맡기게 되었다.
사실 넷째가 낯가림이 심해서 옆집 여자가 놀아주려고 쫓아오면 도망 다니느라 바빴는데
이 날은 신기하게도 넷째 스스로 옆 집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갔다.
엄마가 아픈 건 아이를 성장하게 하는 건가.
그렇게 우버를 타고 아이들을 픽업해서 집에 왔다.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엄마를 아이들은 낯설어했다.
그 와중에 난 살림을 다 했다. 밥도 했고 청소도 했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저 늘 하던 대로 묵묵히 내 할 일을 해내었다.
물론 다리는 아팠고 큰 아이가 옆에서 많이 도와주기는 했으나 아직 초등학교 3학년인 큰 아이는
할 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다.
남편에게 다리뼈가 부러졌다고 연락을 했다.
“나 지금 못 가는데 어떻게 하지?”
남편의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사실 나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워낙 지금이 가장 바쁜 시기였고 남편 없이도 늘 모든 걸 해결해왔기 때문에
아쉽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은 늘 익숙했다.
그냥 그렇게 상황보고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 것 같았다.
아이들 학교에는 금요일 하루 아이들 결석을 시키겠다고 말을 했다.
금요일에 바로 정형외과를 가야 했고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모든 것이 멈췄다.
아이들도 나도, 내 다리가 부러짐과 동시에 일시정지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