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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공 Feb 13. 2022

36. 표현의 자유

말못회 [말 못 하는 작가의 회고록] : 츤데레



36. 표현의 자유 

    

어디 무서워서 말이라도 하겠나 싶다. 

지인끼리 언어 조심해야 할 때도 그렇고, 잘못 내뱉은 단어 속에 기천만원의 계약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유명인들은 말 한마디에 팬들이 싸그리 뒤돌아서기도 하며, 우리는 언어 선택의 부주의와 미숙함으로 많은 인연을 돌려보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듯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말을 아껴간다. 아마, 글을 쓰는 작가가 가장 고단할 지니라.

      

온라인으로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조금 더 의기소침해 지곤 했다. 아마도 많은 작가들이 그럴 것이다. 


종교, 정치, 페미니즘 등 이분적 사고로 나뉠 수 있는 주제가 나온다면, 작가들은 극도로 말을 꺼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글을 쓰고 싶다면 접두사에다가 ‘이 글을 써도 될지 말지 고민했는데..’ 라거나, ‘오해가 없길 바라며’라는 끝맺음을 붙이기도 한다. 

나 또한 그러하다. 뭇매를 맞을까 봐 두려워, 종교나 정치를 등장시키는 part가 나온다면, 위와 같은 어미 조사를 붙여주어야 돌 하나라도 덜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 그러다 갑자기 문득 작가는 너무 열이 받지 않더냐. 내가 읽어달라 강요했느냐, 쌀을 달라 하였더냐, 아니면 선동을 했더냐. 내 까짓게 끄적이는 문자 따위가 선동이 될 수 있다면, 그들의 단체, 또는 집단의 토대(土臺)는 너무도 부실한 것이 아니냐. 


작가의 습작이 한 조합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그리 큰 파급력을 지녔었나 싶다. 내 표현의 자유를 막는다면, 그들은 내 입김에도 흔들리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기초가 부실한 건설회사였음에 무너져야 당연한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일개 나부랭이가 지껄이는 표현 정도는 사뿐히 무시해 줘야 그것이 제법 튼튼하지 않냐는 반증이 되지 않겠나 싶다. 내가 굳건하다면야 지나가는 바람 따위야. 

    

하지만, 나의 글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완벽하여 그들의 사상을 뒤흔들기에는 충분했나 싶다! 표현의 자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조금이라도 제 사상과 맞지 않는다면, 대뜸 블라인드를 쳐버리는 짓도 그렇고, xx비하라며 지옥에 떨어질 거라 저주하는 그들을 보면서도 알 수 있다. 


입 닫으라고 마스크를 씌워놓고는, 요즘 문학계에서는 볼만한 글이 없다고, 다들 알맹이 없는 똑같은 글뿐이라며 혀를 끌끌 차는 소리 하는 사람들의 뇌구조가 궁금하다.

 

그들이 예쁘게 말해달래서 상냥하게 말해줬더니 지루하다 듣기 싫어하고, 조금 더 자극적으로 말해 달라길래 소리 좀 질렀더니 돌을 던진다. 이러한 일을 몇 번 겪고 나서 작가, 그리고 여러분들은 상대방에게 말할 때 너무 졸리지도 않게, 너무 시끄럽지도 않게 중립적으로 말하는 방법을 배우곤 했는데,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남들과 다를 것 없는 평균(平均)적인 사람이 되고, 표현(表現) 하는 방법을 잃어버리곤 했다.     


츤데레

[명사] 쌀쌀맞고 인정이 없어 보이나, 실제로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을 이르는 말

규범 표기는 미확정이다.     


나는 낯간지러운 말을 잘 못 하는 편이다. 선물을 하나 사서 주더라도, ‘내 꺼사면서 그냥 같이 하나 샀어’ 라던가, ‘시간 남길래’ 라던가, ‘그냥 지나가다 보이길래’, ‘할인하길래.’같이 음성의 높낮이 없이 말해야 나는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있었다. 사실 그 사람이 생각나서 준비한 게 맞는데 말이다. 



이러한 나를 잘 아는 주위 사람들은 내게 츤데레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일본어긴 하지만 아직 한국어로 대체할 만한 단어가 없다. 새침데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앙칼지며 시치미를 뚝 떼 진 못하고, 깍쟁이라고 하기에는 그만큼 약삭빠르진 않은 것 같다. 


나는 제 나름 생각해서, 받는 사람이 부담을 느낄까 봐 최대한 담백하고 시크하게 말한 것뿐인데, 작가의 세계에서 이것은 용납되지 않는 듯하다. 비단 작가뿐 만이 아니다. 사회생활에서 여러 일례로 사람들은 표현하는 걸 무서워한다.      


“내가 이거 지금 화내도 되는 상황 맞는 건가?”


라며, 언제 화내고 울어야 하는 상황인지도 모르고 남 눈치만 살피기 바빴다.     


“죄송한데, 이거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웃기는 말이다. 제 기준 안될 부탁이면 하지를 말고, 될 부탁이면 ‘이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 될 것이지, 상대방에게 부탁을 해도 되는지 안 해도 되는지부터 묻고 있다. 먹고 말하라고 뚫린 제 입인데 말이다. 


화내야 하는 기준이라거나 슬퍼야 하는 기준은 형법에 나와있지 않다. 내가 화나면 화난 것이고, 내가 슬프면 슬픈 것이지 50%가 넘는 과반수가 컨펌해야 울 수 있고 소리 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글동글하게 말하지 아니하면, 돈을 벌지 못하고 밥을 먹지 못할까 봐 망설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보기보다 사악하다. 어깨가 축 처져 웅얼웅얼 쩜쩜쩜 만 붙이는 사람들은 더욱더 무시받기 십상이다. 지금 표현(表現) 하지 않으면, 우리의 목소리는 더 더 묻혀만 갈 것이다. 말해도 된다. 


당신이 하는 말이 개소리라면 그저 묻힐 것이고, 그것이 조금이라도 더 상대방의 마음을 후벼 판다거나 심기를 건드린다면, 돌을 맞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정도로 만족하자. 왈왈이나 옹알 옹알이 아니라, 말이라도 했으면 됐지 않나.  

   

‘당신의 인생’이라는 영화의 주연인 당신이, 조금 더 표현에 있어 당당해졌으면 소원하는 바이다. 돌 맞을까 두려워말자. 그 영화 속 ‘지나가는 행인 1’ 일뿐인 그들에게 나 또한 돌을 던지면 그만이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크다면, 더 크게 지르면 된다.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part.27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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