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못회 [말 못 하는 작가의 회고록] : 칭찬
38. 어머! 너무너무 멋져요 정말!
말하는 모양새가 친절하지 않아 보이는 작가일지언정, 나 또한 언젠가는 ‘칭찬 봇’이었던 적이 있다. 사람들과 대면하는 일이 많았던 나는, 상대방을 만날 때는 항상 ‘칭찬’을 하곤 했었다.
첫 만나는 사람이라도,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낯간지러운 말을 제법 잘하는 편이었다. 외모적인 칭찬으로는 옷을 잘 입는다, 잘생겼다 멋지다 예쁘다, 잘 어울린다, 고급스럽다 세련됐다.라고 술술 나열할 수 있었고, 그마저 칭찬할 편이 없다면 성격이 좋아 보인다, 러블리하다, 공감능력이 좋다, 상대방을 배려 잘한다 등등 뭐 하나 끄집어내서라도 칭찬하는 ‘칭찬 봇’이었다.
아니, 사실 그것은 칭찬이 아니라 공치사(空致辭)였다. 나는 이러한 겉치레로 포장해서 당신에게 가식을 떨어주었으니, 당신은 나를 욕해서는 아니 된다 하는 일종의 쉴드이기도 했다.
가식(假飾)
[명사] 말이나 행동 따위를 거짓으로 꾸밈
나는 그렇게 상대방에게 먼저 칭찬이라는 선빵을 날리고선, 당신은 이제 내게 인색해서는 안 된다 하는 무언의 압박을 주기도 했다. 그런 나를 욕하는 당신은 나쁜 사람이 됨을 알기 때문이다. 어디 사회생활에서 ‘인물도 좋으시고 성격도 유쾌하시네요’ 하며 웃으며 말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뭔데 날 평가하죠? 기분 나쁘네요’하며 베베꼬인 사람처럼 맞받아 칠순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대방은 칭찬 한마디에 무력화되어, 제할말을 까먹은 채 입 닫아 버린 적이 몇 번 있을 것이다. 웃는 낯짝에 침못뱉는 다는 소리가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닐 것이니라.
이러한 나는, 어떠한 계기로 인해 ‘칭찬’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것은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난 이후부터였다. 동족 혐오랄까. 나와 비슷해 보이는 그 사람을 만난 이후로, 나는 뭔가 모르게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나보다 더 업그레이드된 칭찬 봇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은 처음 만난 나에게 다다닥 칭찬을 쏟아냈다. 내가 무슨 신이라도 된마냥, 완벽한 꽃 한 송이라도 된마냥 말이다. 분명 그의 눈빛은 초점이 없고, 로봇처럼 인식된 말을 쏟아내는 것 같아 보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게다가 뭐라 반문하지 못하였다. 분명 그 사람 말속에, 은유적으로 나를 돌려 까는 문장이 함축되어 있음이 분명한데, 나는 뭐라 반박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예시를, 가까운 일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가 보자. 연예인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해달라고 헤어디자이너에게 사진을 건넸다. 미용사는 영양 앰플 10만 원과 두피케어 10만 원 까지 추가하여, 나의 머리에 성심을 다해 준 듯하다!
머리를 말리고 거울을 본 순간, 왠 최양락이 하나 앉아있더라. 그리고 그런 나에게 미용사는 칭찬을 가득 담아 말하였다.
“어머어머 고객님, 너무 잘 어울리신다 그쵸. 엘레강스한 스타일이 고객님하고 너무 잘 어울리세요. 이런 고급스러운 스타일 소화하기 엄청 힘든데, 고객님은 외모가 되시니까 배로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여기다 대고 ‘제정신이에요? 당신 눈에는 이게 30만 원짜리로 보여요?’ 하며 언성을 높일 사람이 몇 있으랴.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물을 머금고, 조용히 헤어숍을 나올 것이고,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그저 평점을 낮게 준다거나, 다시는 그 미용실에 가지 않겠다는 다짐뿐일 것이다.
우리는 칭찬을 아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심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칭찬은 아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상대방을 입 닫게 해 버리는 무언의 폭력이자 짓누름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는 칭찬보다 비슷한 말로는, 격려 한마디가 어떨까?
격려
[명사] 용기나 의욕이 솟아나도록 북돋워 줌.
미용사가 칭찬이 아니라, ‘머리 꼴이 엉망이지만,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하고 격려를 했었더라면,
우리는 당당히 환불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