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lda 길다 (1943) : 형벌아닌 사랑에 대하여

집착과 순수한 애정은 서로 닮아있는가?

by 베로니카 Veronica




Gilda 길다는 1943년 작으로, 리타 헤이워드의 완벽한 퍼포먼스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필름 누아르'의 전형적인 컨셉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엔딩 부분에 이르러 장르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또 다른 한계에 머물게 되는 점은 다소 아쉽지만, 적어도 이 작품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지금까지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이 영화는 남자를 파멸로 이르는 아름다운 여성상과 카지노, 도박과 범죄로 이루어지는 '필름 누아르'의 클래식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혐오와 사랑이 녹아있다. 이 부분에서 길다는 전형적인 팜므파탈과는 조금 다른 캐릭터로 변모한다. 그녀는 나이아가라 속 마릴린 먼로나, 스칼릿 스트리트 속 키티, 007 속 본드걸이 아닌, 본인도 감당하지 못할 능력을 지닌 여성으로 탈바꿈된다. 그 능력은 남성을 유혹하고, 지배하는 것을 뜻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녀는 감당하지 못한다. 감당하지 못하는 능력은 사용될 수 없음으로, 그녀는 무력하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행위는, 자기 파괴적 행위라는 점에서 우리는 길다가 또 다른 스테레오 타입에 머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을 갈구하며 결핍을 느끼는 여성이 유일한 무기로 자신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길다는 순진한 위치에 놓인다. 길다의 순진은 섹스심벌인 먼로가 표방했던 아이스러운 면모와는 확연히 다르다. 길다는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를 정확하게 인식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섹스어필은 또 하나의 자해가 된다. 자신을 세탁물이라고 칭하는 것에 동조하거나, 무대에서 야릇한 퍼포먼스를 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그녀는 자신의 자해를 우리에게 전시함으로써 순진함을 과시한다. 본래 자신의 무력함을 전시할 수 있는 것은 순진함뿐이고, 순진함은 종종 무모함으로.



그렇게 그녀는 자기 주도적이거나, 음흉한 팜므파탈 캐릭터로 해석될 수 없는 위치에 선다. 그녀는 쉽게 두려워하고, 우울해하며, 감정을 다루지 못할 만큼 어설프다. 과거는 없고 오로지 미래만 있다던 영화 속 대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길다의 행보와는 대척점에 이른다. 그녀는 끊임없이 과거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는, 형벌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나이아가라 속 먼로가 목이 졸려 살해되고, 스칼릿 스트리트 속 키티가 칼에 찔려 살해되는 것과는 달리, 그녀가 쟈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이유 또한, 그녀가 팜므파탈이 아님을 시사한다.


결국 그녀는 그 어떤 남성도 망치지 않았고,

그 어떤 남성도 그녀를 망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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