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이 한 달 남았다. 이때쯤 되면 우리 만학도 학생들의 긴장감은 급상승한다. 평소에는 바빠서 수업만 듣기에도 급급했던 어머님도 집에서 스스로 자습을 해오거나, 선생님에게 질문이 많아진다. 다들 체면이 있어서 그런지 침착한 척 하지만, '지금 시작해도 점수가 나올까요?' 같은 걱정 어린 푸념이 새어 나온다. 시험 앞에서는 나이와 연륜도 어쩔 수가 없는 법이다. '이것만 외우면 1문제 반드시 맞춘다!' 같은 소위 족집게 수업을 하면 교실 안에 있는 눈동자 14개가 일제히 반짝 거린다. 그러니 우리 학생들이 얼마나 합격에 목말라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니 평소에 해두시면 좋았을 것을^^
리안 씨는 걱정이 많아 보인다. 늘지 않는 본인의 실력에 속앓이를 하다가, 가끔 내가 '이건 어려운 게 맞아요. 틀리는 게 당연해요'라고 말하면 리안씨는 누구보다 크게 안도한다. 하루는 학생들이 필기하는 게 서툴길래 '학생 분들은 10대 학생들이 유치원 때부터 해오던 공부를 속성으로 하고 계시잖아요. 서툰 게 당연하니깐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세요. 진짜 중요한 거는 제가 사진 찍어서 핸드폰으로 보내 드릴게요.'라고 말씀드렸는데, 리안씨가 '그렇죠. 나는 연필 잡고 글 쓰는 것부터 따라가질 못해. 이거 이상한 거 아니죠? 괜찮은 거겠죠?'라면서 가슴을 쓸어내리셨다. 이 분께서 그동안 남몰래 애를 먹고 있었구나. 맘처럼 되지 않는 공부를 부여잡고 마음고생을 하고 계셨나 보다.
학업 성취도로 우리 반 학생들을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눈빛만 봐도 든든한 우등생 그룹, 공부를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이 대견한 도전자 그룹, 그리고 리안씨가 속한 중간 그룹이다. 리안 씨의 실력은 어중간하다. 쉬운 과목은 해볼 만 한데, 영어 같은 어려운 과목은 영 힘들어하신다. 본인도 의지에 비해 따라주지 않는 몸에 갑갑해하는 게 느껴진다. 도전자 그룹보다 오히려 이 중간 그룹 분들이 더 시험 앞에 스트레스를 더 느낀다. 시험에 불합격하시고 말없이 학교를 나오지 않는 분들도 이 중간 분들이 많다.
시험에 합격하는 학생보다 합격하지 못하고 포기했던 학생들이 마음에 남는다. 시험에 합격을 하면 수년간 공부로 고생한 걸 보상을 받는다. 평생 해보지 않았던 싸움, 활자들 속에서 낑낑댔던 3년 이상의 시간을 보상받을 수 있다. 하지만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그간의 시간이 허망하다. 검정고시는 합격과 불합격이 있을 뿐이다. 한 문제 차이로 희비가 갈리는 걸 몇 번이나 봐왔다. 수년동안 한두 문제 차이로 불합격해서 공부를 포기하신 분이 계시다. 괜히 공부하자고 들쑤셔서 편히 살아가실 분에게 고생을 시켜드린 건 아닌지, 겪지 않아도 될 좌절을 야학이 안겨드린 건 아닐까. 합격증서 말고는 그녀들의 고생을 보상할 수 있는 게 없는걸까. 나는 부합격한 학생들에게 무얼 줄 수 있나.
리안씨는 30년간 중식집을 운영하셨다. 동네에 야학이 있다는 걸 이웃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장사를 해야 하니 공부할 시간이 나질 않았다. 은퇴를 하고 나서야 우리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고등반에서 함께 공부하고 계신다. 그녀의 살가운 말투를 보면, 그가 젊었을 적 어떻게 동네 단골손님을 대했을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수업을 하는 내 목소리가 조금 거칠다 싶으면, 집에서 끓여 온 보리차를 건넨다. 그리곤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선생님~ 일 년 동안 늦은 밤에 여기까지 오시고 힘드셨죠? 고생 많으셨어요."라고 플러팅을 날린다. 난 고작 일주일에 한 번 왔을 뿐인데. 본인은 매일같이 학교에 왔으면서. 사람을 무장해제 시킬 수 있는 그녀의 친근함은 공부보다 더 중요한 자산이다.
인생에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내 생각에는, 설사 시험의 결과가 좋지 않아도 괜찮다. 부디 우리 학생들이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했으면 한다. 누구도 시키지 않은 공부를 스스도 하다니, 그것도 완주를 해내지 않았는가.
"선생님, 출석부 한번 보세요. 우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친구들 다 같이 학교에 오고 있어요. 우리 예쁘죠?"
나이 지긋한 60대 어르신이 '나 예쁘지 않아요?' 라니. 상황이 어색하긴 한데, 틀린 말도 아니다. 아닐 게 뭐 있는가. 리안 씨는 이미 어렴풋이 아는 것 같다. 결과를 떠나서, 본인이 공부해온 시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걸. 그녀들의 도전정신은 봄꽃보다 향이 나는걸. 꽃보다 할매들 파이팅.
(사진은 챗GPT로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