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깨닫는 아빠 마음
교문에 서서 딸래미들을 기다리며 종종 생각에 잠기곤 한다. 학교에서 나와서 나를 발견하고 웃으며 손을 흔들고 뛰어오는 딸래미들 뒤로 고개를 푹 숙이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보인다.
엄마가 계실 때에도 맞벌이었기 때문에 교문으로 데리러 온 기억은 없건만, 왜인지 교문에 서있는 다른 엄마들을 보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특히 예고도 없이 비가 오는 날이면, 아이들이 하교할 때까지 더 기다렸다가 어느 정도 다 아이들이 집에 가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목에 집 열쇠를 매고 터벅터벅 걸어오던 길이 어찌나 쓸쓸하던지..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텔레비전을 켰다. 그 시절엔 케이블이 없었다. 그나마 내가 볼만한 건 EBS 뿐이었으나, 그마저도 다큐멘터리나 수준에 맞지 않는 걸 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 비디오를 틀었다. 수백 번은 봤을 우리 집에 단 하나뿐인 비디오인 “디즈니 알라딘”이었다.
친오빠는 이걸 또 보냐고 타박했지만, 내 유일한 휴식시간이었다. 나중에 투니버스가 생기면서는 짱구는 못 말려가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만화는 내 지친 일상을 잊게 해주는 고마운 친구였다.
짱구엄마의 잔소리로 가정교육을 받았고, 짱구 친구들은 내 친구들이었다.
그때부턴가 나는 마음이 불안하면 봤던 영화나 드라마를 다시 보곤 했다. 결과를 알고 보는 게 뭐가 재밌느냐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결과를 알기에 주인공의 역경도 고난도 참아낼 수 있었다.
마지막엔 결국 역경을 헤치고 행복한 끝을 맞이한다는 점이 나에게 위안을 주었고, 더불어 예상치 못한 고난이 없다는 점에서 안정감을 주었다.
그렇게 내 외로움을 달래줬던.. 그 만화를 지금 우리 딸래미들과 같이 볼 때 마음이 참 이상했다.
그저 웃으며 보는 너희들이 예쁘면서도 부럽고, 좋으면서도 쓸쓸했다.
그리고 그 표정을 아빠에게도 보았다.
아이들이 방학이면 아빠는 우리 집에 며칠 머물다 가셨는데, 한참 머물다 집에 모셔다 드리고 나올 때면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었다.
나는 더 좋은 여건과 가족 안에서 화목하게 사는데 아빠는 그 자리 그 집에서 여전히 고여있는 거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큰 짐승은 어릴 때부터 말뚝에 매어 두면, 그 당시엔 말뚝이 더 단단하게 박혀 못 빠져나간다.
하지만 그 짐승이 성장한 이후엔 말뚝보다 힘이 세지만, 이미 이 말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절대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한다.
아빠의 인생도 그런 건 아닐까.
불행이라는 말뚝에 너무 오래 메어있어서 이제는 힘이 쎄 빠져나올 수 있는데도 거기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건 아닐까.
언제고 내가 저 말뚝을 뽑아 자유롭게 해 드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