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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어리 Nov 16. 2022

베트남 실크 회화

거친 현실을 꿈과 같이

2019년 여름, 베트남 출장을 계기로 들렀던 하노이 국립미술관(Vietnam National Fine Arts Museum)에서 실크 회화(Silk Painting)를 처음 만났다.


전시실의 항온항습 같은 것은 필수 조건이 아닌 듯했다. 미술관이라고 해서 8월 하노이의 여름 날씨를 피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숨이 턱 막히는 한낮의 더위는 활짝 열린 개방형 전시실에도 이어졌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 지어진 노란 빛의 미술관 건물에는 크지 않은 전시 공간들이 이어 붙어 있었다. 방 하나를 보고 나와 다음 방으로 들어가는 식으로 전시실을 넘나들며 한국인이라면 친숙한 불상 조각부터 중국의 영향이 보이는 동양화, 수공예품들을 지나 베트남 락커(칠기) 회화, 실크 회화까지 방대한 소장품을 살펴볼 수 있었다.


출장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계속 마음속에 떠오르는 작품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베트남 실크 회화였다. 어떤 이름 난 국제 아트페어에서도, 세계의 주요 미술 작품들이 집약되었다는 뉴욕과 유럽의 어느 저명한 박물관에서도 본 적 없는, 그야말로 난생처음 보는 장르의 그림이었다. 그곳에서 보았던 베트남 락커(칠기) 회화 역시 처음 본 것이었는데, 추상표현주의 이후 수많은 현대미술 작품들에서 보아 온 강렬한 색과 질감을 지닌 표현적인 락커 회화보다는 흐릿한 색감과 부드러운 질감을 가진 실크 회화만이 내 마음을 끌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유리 액자 안에 담긴 채 전시되었던 터라, 스마트폰 카메라로 담은 사진들은 온통 반사광과 원치 않게 비친 내 그림자 때문에 현장의 감동을 조금도 담아내지 못했다. 1900년대 초반부터 융성했던 베트남 실크 회화는 특유의 섬세한 염색 기법을 요한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 누런 빛으로 바랜 실크 바탕에 가볍게 스며든 염료가 담아낸 담백함과 간결함은 한국의 수묵담채화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작품이 묘사한 것은 시조의 한 구절을 연상케 하는 풍경화나 장식적인 동식물의 묘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록(documentation)에 가까운 장면들. 작업복을 입은 공장의 여공들, 자수를 두는 직업학교의 여학생들,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의 풍속화 그리고 전통 복식을 입은 소수민족 여인들의 초상화. '노동자', '농민', '촌로', '장삼이사' 등등으로 요약되는, 한 시대를 살다 간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들이었다. 고된 노동의 일상, 분명 거친 주름과 딱딱한 굳은 살을 가졌으리라 생각되는 사람들의 초상은 역설적으로 아기 피부처럼 부드러운 실크의 표면 위에 투명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마치 35mm 슬라이드 필름을 빛에 비추어 보듯이, 그렇게 가까이서, 액자가 반사하는 빛 얼룩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실크 표면을 들여다보았다.


각박한 현실을 꿈으로 치환하듯, 그렇게 꿈결 같은 실크 표면이 한 동안 내 마음속을 떠다녔다.


마치 피난을 가는 듯 긴박한 농촌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한 실크 회화
수를 놓는 여인들, 그녀들이 만드는 자수까지 흐리지만 섬세하게 묘사된 실크 회화 Tran Dong Luong, "Embroidery Team", 1958
베트남 북부 사파 지역에 거주하는 소수종족 다오(Dao) 여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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