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댕굴이 Sep 13. 2023

나는 루피가 싫다

생각해 보면 나는 옛날부터 주인공을 좋아한 적이 없다.

만화든 영화든 주인공보다 묵묵히 제 갈 길 가주변인물들에게 더 마음이 갔다.

루피보다는 조로, 강백호보다는 정대만, 태공망보다는 천화.


이제 막 바다에 나온 주제에 툭하면 해적왕이 될 거라고 외치는 루피도, 마시면서 배우는 술게임도 아닌데 시합 중에 농구를 배우면서도 스스로를 천재라 일컫는 강백호도

'입방정 떨지 말고 뭐라도 해낸 다음에 말했으면' 싶었다.


뭔 소릴 하는 거야? 이 녀석....


주인공 녀석들의 꿈같은 소리를 시도 때도 없이 듣고 있다 보면 괜스레 뿔다구가 나서 한 번쯤 호되게 당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바람이 무색하게도 주인공의 위기는 곧 레벨업을 위한 빌드업이 될 뿐이었다.




주인공들은 보여준다.

노력하면 얻을 수 있고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어렸던 나는,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 줄 알았다.


잘못 안 건 아니었다.

같은 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노력의 양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을 뿐.

덤으로, 시간은 나에게 '노력에 올인할 수 있는 환경' 또한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원하는 만큼, 원할 때까지, 원 없이 노력하는 것도 주인공의 특권이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자신을 '해적왕이 될 사나이'라고 소개하는 루피거슬렸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식상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자. 아무 읽지 않는 양산형 소설의 주인공도 주인공이긴 하니까)


해리 포터를 읽으며 혹시 나에게도 호그와트 입학 편지가 날아오진 않을까 창 밖을 내다보던,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내 안의 비범함을 기대하던 순수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내가 일궈낼 수 있었던 최선의 현실 살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고,
간절히 원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게 있다.

패배주의에 찌들어 의미 없는 말을 되뇌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포츠의 역사 남겨진 수많은 기적을 마주하다 보면 노력과 간절함의 힘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요구된 만큼 쏟아붓지 못한 나의 노력이나 더 많은 노력을 요구받은 내 상황을 폄하하거나 원망고 싶지도 않다.


이제는 주변의 성공에 열패감을 느끼기보다는 애초에 우리는 경쟁 상대가 아니었음을, 내 안의 비범함은 결코 평범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가 온 것이다.




더 이상 소년판타지를 보며 꿈과 희망을 키운다거나 내 안의 열정을 끄집어내려 노력하지 않는다. 대신 미야자키 하야오나 픽사의 영화를 보며 삶의 위로를 얻는다.

원대한 꿈과 이상보다는 소소한 행복과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디즈니픽사, 소울)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안정적이었던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대체로 행복하지만, 문득 아쉬울 때도 있다.

그때 이랬더라면, 이것만 있었더라면, 그것만 해냈더라면...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물 밀듯 쏟아질 때,

원망할 것은 오로지 하나.


대단한 것을 이뤄야만 멋진 인생이라고 착각하게 한 그 시절 꿈동산 판타지만화, 너만을 탓하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인에게 '빌드업'이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