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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댕굴이 Jan 31. 2023

출장 가는 비행기 안에서

손바닥, 엉덩이. 둘 중 뭐로 할래?


숙제를 지 않은 중학생 아이는 양자택일의 중대한 선택 앞에 마주 섰다. 아프기는 엉덩이가 덜 한데, 칠판을 마주 붙잡고 서서 반 친구들 방향으로 엉덩이를 내미는 동작이 주는 수치스러움 때문에 아이는 대체로 손바닥을 고르곤 했다.


"몇 대?"


햄버거 몇 개, 라면 몇 봉도 아 손바닥 몇 대. 선생님의 너그러움 또는 장난기회초리를 받아낼 부위뿐만 아니라 그것을 휘두를 횟수조차 학생들의 결정에 맡기곤 했는데, 그 시절 어느 누구도 '한 대'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마치 최소 세 대 정도는 학생들 간의 암묵적인 약속이자 선생님에 대한 예의라도 되는 것처럼.

잘못을 하면 체벌을 받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던 시절은 부지불식간에 사라졌다.
어리게만 보이던 동생이 학교에 들어가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그제야 체벌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옛사람의 추억이 된 것을 알았다.

동생이 학교에서 받은 꾸중 무용담을 듣다 보면, 신체적 타격 없이도 학생들에게 고통을 유발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음이 새삼 놀라웠다. 그중 단연코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름도 고상한 '생각하는 의자'.

'생각하는 의자'는 교실 뒤편 제일 구석에 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놓아둔 의자에 홀로 앉아 스스로 반성의 시간을 갖게 하는 벌이다.

사춘기 시절 아이들에게는 반 친구들로부터 떨어져 고립된 장소에 몇 분 간이나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좌불안석 앉아있는 것이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겠으나, 사춘기의 감성보다 손익 관점의 이성이 앞서던 나로서는 잘못의 벌로 '생각할 시간'을 부여받는다는 것 호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생각하는 의자'는 우리집에서도 종종 소환되곤 했는데, 엄마가 우릴 꾸중할 때가 아니라 그럴싸한 이름에 매료된 우리식 장난의 일종으로 활용되었다.
나와 동생, 엄마와 우리는 무언가 기억이 나지 않거나 뜻밖의 언쟁이 잠시 소강상태에 이를 때면 서로가 서로에게 생각하는 의자에 다녀오라 말하며 대화의 화제나 분위기를 전환했다.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체벌이 교정에서 자취를 감추었듯, '생각하는 의자'로 농담하던 우리식 대화 습관도 잠시간의 유행을 거친 후 우리집에서 슬며시 사라졌다.




열흘간의 출장길. 오랜만에 비행기에 오르며, 긴 세월 잊고 지냈던 생각하는 의자가 떠올랐다. 누군가는 새해를 기점으로 한 해의 다짐을 하고, 누군가는 화장실에서 자신과의 힘겨루기를 하다 말고 밀린 생각을 정리한다는데, 나에게는 인터넷도 터지지 않고 운신의 폭이 팔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좁은 좌석이 앞으로의 인생을 계획하고 더 나은 나를 위한 다짐과 결심을 이끌어 내는 시공간이 되어준다.

장시간의 비행은 그동안 미뤄왔던 생각들을 정리하기에는 최적의 공간이다. 

혼자 있을 때 휴대폰 속 세상을 하릴없이 배회하고, 집에 있을 때 티비 속 만들어진 웃음을 내 것인 양 보며 '직장인의 스트레스 해소'라는 명분 아래 미뤄두었던 모든 것들이 서랍 밖으로 끄집어내지는 순간.

대륙의 끝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 달 안에는 꼭 끝내겠다고 다짐했으나 아직도 스무 시간어치나 남은 동영상 강의를 다섯 시간 정도 들었고,
진작부터 어야겠다고 다짐하며 밀리의 서재에 담아두기만 했던 책을 절반 정도 읽었으며,
올해의 계획과 이를 위한 실천사항을 수첩에 끄적였다.

가만히 나의 현재와 미래를 골몰하다 보면, '계속 이렇게 살 순 없다'는 갑작스러운 자기반성과 '더 나은 인생을 만들어보겠다'는 묵은 열정과 의욕이 쌓여있던 먼지를 털어내고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닭장 속에 사육되는 닭들마냥 빼곡한 의자에 앉아 정해진 시간마다 제공되는 기내식을 거르지 않고 받아먹는,

내 인생에서 가장 억압된 열세 시간 동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의욕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 된다.

기내식과 기내식 사이, 어두컴컴해진 비행기 속 형벌이라 해도 무색하지 않은 비좁은 '생각하는 의자'가 빚어낸 계획과 다짐, 열정과 의욕은 꼬리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내세울 것도 없는 중간치기 인생에 언젠가 한 번은 터닝 포인트가 올 것만 같다는 얄궂은 희망을 키워낸다.




카르페디엠. 유구한 인류와 문학과 철학의 역사에서 현재에 충실하라는 깨달음은 전달자의 입맛에 따라 겉포장만 바뀔 뿐 삶의 명제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꿈을 꾸고 희망을 갖는 자의 삶은 어떠한가.
누군가는 꿈을 꾸는 것 자체로 행복할 것이요, 누군가는 꿈을 이루지 못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며 꿈을 향해가는 모든 과정 불행할 것이다.

타고나길 전전긍긍 걱정쟁이인 나에게 꿈과 희망은 고통이다. 생각하는 의자가 선사한 낯선 고통을 받아내며, 그래도 지루한 것보다는 도전하고 좌절하고 부딪치고 후회 없는 그런 인생이 낫지 않겠냐며, 평소의 나라면 생각지도 못할 긍정과 낙천의 힘으로 희망을 품는다.

호기심 때문에 인류를 고통스럽게 할 모든 것을 세상에 풀어놓은 판도라의 상자 그 모든 고통 속에 희망숨겨 놓았듯, 막연한 꿈이 주는 고통 에는 언제든 원하면 돌아올 수 있는 아늑한 현재가 있음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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