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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H Sep 27. 2024

[EP 02] 제가 말로만 듣던 그 열정의 노예인가요?

청춘의 다른 말이 언제부터 노예였나요

내게 해 줄 말이었다는 건 계약직 신분으로 정규직과 다르게 적용되는 규정들이었다. 정규직은 입사하고 15일의 휴가가 바로 생기지만 나는 한 달 만근시 하루의 휴가가 생기는 구조로 1년에 11일의 휴가가 생기게 되고 그마저도 첫 달은 쓸 수 없었다.


또 복지포인트는 정규직들에게 80만원씩 제공되지만 계약직인 나에겐 60만원이 제공되고 건강검진은 출생 연도에 따른 대상자일 때만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십여 분간 이런저런 설명들을 듣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는 걸음걸음마다 민머리 민차장의 말이 맴돌았다.

그가 나에게 이름을 알려주거나 자기소개를 했던 건 아니었지만 직원들 자리마다 명패가 놓여있어서 나를 줄곧 안내했던 30대 중반의 민머리 남자가 민병식이라는이름에, 차장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신의 일이 끝나면 얘기하자던 팀장이었다.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아 넵!"


긴장감 반, 빠릿빠릿한 신입의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는의무감 반으로 재빠르게 대답했다. 공식적인 회의는 아니었지만 간단한 메모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 다이어리와 펜을 챙겼다.








부서원이 상주하고 있는 사무실 한쪽 테이블에 얘기를 나눌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다르게 팀장은 문밖으로 먼저 유유히 나가고 있었고,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어디로 가는 거지?

부서원 모두가 참여하는 회의라면 4인용 테이블로 부족할 수 있지만, 팀장과 나, 단둘이서만 하는 대화라면 충분할 텐데…? 이해할 수 없는 머리와는 다르게 발걸음은 팀장의 그림자를 바짝 쫓아가고 있었다.


사무실을 나서면 왼편에 직원용 휴게실 겸 탕비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화장실이 있었다. 오늘 아침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여기저기 불러 다니는 터에 화장실도 가본적이 없었고, 회사 내부 구조에 대한 설명도 듣지 못해서 겸사겸사 알아두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직원용 휴게실이라는 푯말이 적힌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소파형 의자 4개와 테이블이 먼저 보였고 간이 파티션 너머로 누워서 쉴 수 있는 싱글침대 3개가 놓여있었다. 냉장고와 개수대가 있는 걸 보니 간단한 음식도 조리해 먹을 수 있고, 점심시간에는 눈을 잠깐 붙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공간 같았다.


먼저 안으로 들어간 팀장은 맞은편에 앉으라며 손짓했고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두 개 챙겨 와 내 앞으로 하나를 쓱 밀어주었다. 이 파란색 캔커피 오랜만이었다.

대학시절 시험기간에 참 애용했었는데……

쓸데없는 생각이 잠깐 스치려던 찰나, 팀장이 경쾌하게따는 캔커피 뚜껑소리에 정신이 금세 돌아왔다.


"A씨 우선 입사 축하드립니다. 저는 홍보팀장 홍창석이라고 합니다.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아 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A씨 도움이 많이 필요해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입사 첫날부터 이런 얘기를 전하게 돼서 매우 유감입니다만 우리 부서가 좀 복잡하게 되어있어요. 한 사무실 안에 공간이 두 개로 나뉜 거 보셨죠?"


내가 처음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그리고 내 자리는 왼쪽에 마련되어 있었지만 상사라는 사람은 오른쪽에서 걸어왔을 때 의아해했던 그 부분을 설명해 주려는 것 같았다.


"우리 사무실은 일단 대외협력부 사무실이에요. 대외협력부는 국제협력팀과 홍보팀으로 나눠져 있고 왼쪽은 국제협력팀, 오른쪽은 홍보팀입니다. A씨는 대외협력부의 국제협력팀 T.O로 뽑히게 되었지만 이번 홍보팀 정규직 채용에서 보충하려고 했던 인력이 지원자 미달로 채용이 취소되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A씨를 홍보팀으로 배치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자리는 국제협력팀 쪽에 마련되어 있지만 주 업무는 홍보팀 업무가 될 겁니다. 홍보팀 인력이 현재로선 저와 A씨 둘 뿐인지라.. A씨가 계약직으로 들어오셨지만 정규직업무도 일부 맡게 될 거예요. 아, 물론 미달된 정규직은 연말까지 채용할 계획이고요."  


듣자마자 머리가 조금 지끈거렸다.


그러니까 나는 기껏 쌓아온 토익점수와 어학연수 등의 대외활동 경력을 통해 대외협력부 국제협력팀에 지원해 입사하게 되었지만 맘에도 없던 홍보팀 업무를 하게될 거고,  팀에 사람이 단 둘이라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업무까지 떠안게 될 거라고?

출근 첫날에 아직 오전 11시도 채 안 된 시간에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내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게 되었다는 걸 느꼈다.   


머리로는 잘못됨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입은 사회생활용 미소를 띠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상사에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있다는 리액션을 성심성의껏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나의 행동은 상대방에게 완벽한 인지라는 사인으로 전달되었을 것이고 홍팀장은 준비해 온 말을 이어갔다.


"홍보팀 주요 업무 중 하나는 기념촬영과 홍보기사 작성이에요. 앞으로 이 업무는 A씨가 맡게 될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기관에 외빈이 방문하거나 행사가 있을 때 사진을 찍고 그 사진과 관련 내용을 기사로 작성해서 홈페이지에 게시하는 거예요. 젊은 분이니 사진 찍기는 잘하실 것 같고 글은 업로드 전에 저한테 검토 맡으시고 게재하시면 됩니다. 홍보기사 작성법은 그동안 홈페이지에 올려진 걸 참고하시면 되고, 당장 내일 원장님 손님이 방문하시니까 기념촬영하시면 되겠습니다."


받아 적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홍팀장은 쌓아뒀던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쏟아진 말들에 머리와 어깨가 한껏 짓눌리는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보통 입사 후에는 오리엔테이션도 하고 보고서 작성법이라던지 시스템 사용법이라던지 이런 걸 익히면서

최소 하루이틀에서 일주일정도는 교육을 받고 본격적인 업무는 천천히 시작한다고 들었는데 계약직 신분에겐 허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A씨가 맡게 될 다른 업무는 이게.. 그 아까 말했던 정규직이 담당했어야 하는 업무인데, 우리 기관을 홍보하는데 필요한 대학생 기자단 사업운영계획을 만들고 올해 동안 직접 기자단 1기를 운영하는 업무입니다. 이력서에 보니 대학 때 대외활동 많이 하셨더라고요? 활동을 해보신 경험도 있으니 잘 운영하실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올해 사업비는 500만 원 정도인데 예산에 맞게 집행하시면 되고, 제가 옆에서 많이 도와드릴 테니 마음껏 아이디어와 역량을 펼쳐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쯤 되니 사회생활용 미소가 더이상 지어지지 않았다.


내가 받는 돈은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긴 정도이고 휴가도 한 달에 하루, 복지포인트도 남들보다 적은데 일은 정규직의 부담만큼 해야 한다니. 세상이 좋아져 옛날만큼 부당하지 않다고들 하던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은 뒤에서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었나 보다.


그저 기가 막히고 숨이 막혔다.

첫날부터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제가 왜 해야 되냐며 반문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만둘래?라고 스스로 자문해 본다면 차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 지낸 지 어연 1년.

백수 딸 취업소식에 기뻐하던 부모님 얼굴이 너무나 생생했다.  하루도 못 버티고 일이 너무 많을 거 같아 그만뒀다고 하면 뭐라고 하실까? 무슨 표정을 지으실까?


또 취업시장에서 공백기가 긴 것만큼 치명적인 위험요소가 없다던데 언제 취직이 가능할지도 모르고, 단기 계약직마저 해본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한 번에 내가 원하던 곳의 정규직에 자리를 얻는 데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SKY급 대학교 졸업장이나 천부적인 재능 따위가 없다면 이 사회에선 내가 을이다.


그래! 최소 3개월은 있어봐야지.

첫날부터 속단하기는 일러.


생각보다 해볼 만한 일일지도 모르고 사업을 운영해 본 경험이 나중에 다 도움이 되겠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홍팀장을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단 당장 필요한 부분은 다 전달한 것 같은데 혹시 뭐 더 궁금한 것 있나요?"

"앗 아뇨 없습니다. 일단 업무를 시작해 보고 모르는 부분은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홍팀장은 일단 해보겠다는 대답을 듣자 그제서야 만족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챙겨 온 수첩을 그대로 덮었다. 할 말도 다 끝났으니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자는 뜻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출입문 앞으로 성큼 걸어가던 홍팀장은 손잡이를 잡다 말고 갑자기 뒤를 돌았다.





"아참! A씨가 부서 막내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영수증 처리와 간식담당도 함께 맡게 될 겁니다. 알아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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