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서사의 시작
1초에 6°씩 돌아가는 시계 초침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정신이 들어버렸다.
사실 지난밤은 깨어 있는 것에 가까운 렘수면상태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누구나 새로운 일을 앞두었을 때는 긴장감과 두려움 때문에 깊은 잠에 들지 못할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가 된 지 만 1년을 꽉 채우고 드디어 직장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난주, 엄마의 강력한 추천으로 지원서를 낸 신설 공공기관에 면접을 보고 왔다.
난 제대로 된 직장 경력이 없었고,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면접대상자였기 때문에 사실 기대가 없었다.
사실 기대가 없었던 건 경쟁률 자체보다는 면접에 탈락할 수밖에 없는 부끄러운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면접관들에게 열정적인 면접자임을 보여주기 위해 인터넷에서 사진으로만 봤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방문해서 둘러보고 간 적도 있다고 거짓으로 답했는데 그때 방문경험에 대해 자세하게 얘기해 달라는
꼬리질문에 횡설수설하게 되면서 "사실은 여기에 한 번도 와보신 적 없으시죠?"라는 말과 함께 들켜버렸다.
머쓱하게 웃어넘겼지만 쥐구멍이 있다면 거기에라도 숨고 싶다는 말이 십분 이해되는 영원 같던 찰나였다.
당연히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가 이틀전 합격전화를 받았고 너무 놀라서 "진짜요? 제가 됐어요?"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대답했는데
"엄청 기뻐하시네요 ㅎㅎ"라고 헛웃음과 함께 대답하던 인사담당자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직 여름이었지만 검은색 슬랙스와 아이보리색 7부 블라우스를 골라 입었다.
최대한 단정한 첫 출근룩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반팔블라우스는 아직 없었다.
운동화를 신고 싶었지만 첫날엔 안될 것 같아 조금 촌스럽지만 금장테가 둘러진 엄마구두를 빌려 신었다.
이로서 누가 봐도 저 사람 오늘 첫 출근 하나 봐 룩이 완성되었다.
20분 정도가 걸려 도착한 회사 앞.
생긴 지 2~3개월밖에 되지 않은 신생 기관이었고 아직 직원은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안정제일주의인 우리 엄마는 예전부터 공무원 또는 선생님이 되길 바라셨었던 터라 공공기관이 새로 생긴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내가 이곳에 들어와 자리 잡길 내심 원했다.
절대 부모님이 보여주는 길만 가지는 않을 거라고 청개구리 같은 횡보를 밟아왔지만 백수 1년은 높다란 현실의 벽 앞에서 차근차근 고집을 내려놓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고 인생은 계단과 같아서 하나씩 밟아나갈 뿐이라고 그렇게 합리화했다.
2층 경영행정실이라고 했었나? 쭈뼛쭈뼛 주위를 둘러보고 있느니 민머리의 남자가 다가와
"오늘부터 일하기로 한 A씨죠?"한눈에 나를 알아봤다.
"아, 네네."
"저 따라오시죠."
어색한 내 웃음이 흐려지기도 전에 자기 쪽으로 손짓을 하며 앞서갔다.
뒤쪽문으로 들어가 파티션으로 둘러싸여진 테이블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어디선가 펜을 가져와 건네면서 "계약서 읽어보시고 사인하세요."
눈앞에 놓인 두세 장쯤 되는 종이는 근로계약서와 연봉계약서 같았다. 계약서상 내용은 명료했다. 나는 앞으로 1년간 일할 수 있고 월급은 대략 182만 원 정도였다.
"아! 초과근무하시면 2~30만 원 더 받을 수 있어요."
그분은 정말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주듯 검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덧붙였다. 이름과 서명란에 빠르게 사인을 했고 각각 한부씩은 본인 보관용이라고 건네받았다.
"자, 다 됐으면 가시죠."
이 공간은 업무시작 전 간단한 행정처리를 하러 들린 곳 일 거고 내가 일하게 될 사무실은 다른 곳에 있으니 이동하자는 말로 정확히 해석되었다.
1층에는 사무실이 없었고 4층까지 있는 건물이어서 내가 있게 될 곳은 어디일지 또 내가 함께 일하게 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 일지 두근거리면서 긴장되었다.
하지만 심장박동수가 최고치를 아직 찍기도 전에 발걸음이 멈췄고 의외로 내가 일하게 될 곳은 계약서를 사인했던 사무실 바로 옆 사무실이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사무실에 있던 대략 4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고작 4명일 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동시에 8개의 눈동자가 한 사람에게 꽂힌다는 건 티브이 드라마에서 봤을 때보다 더 부담스러운 순간이었다.
사무실은 정사각형이었는데 왼편에 5개의 사무공간 오른편에 2개의 사무공간이 있었고 오른편 앞쪽에는 아마도 내부 회의용으로 쓰이는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왼쪽 5개 중에 3개의 사무공간에는 사람들이 앉아있었고 오른쪽엔 한 명만 있었다.
예상가능하다시피 제일 안쪽은 상석으로 비교적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앉는다. 하지만 한 사무실에서도 두 개로 나눠진 듯한 구조에 내 자리는 어느 쪽 일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안내해 준 민머리의 남자는 오른쪽 끝에 앉아있는 안경 쓴 남자에게 다가가 "팀장님, 이분이 A씨입니다."라고 나를 가리키며 얘기했다.
안경을 쓴 남자, 그러니까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럼.."이라는 말을 남기고 나에 대한 소개나 추가적인 설명 없이 바로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팀장은 내게로 다가와 "반가워요. 앞으로 잘해봅시다." 라며 악수를 청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내민 손을 잡으며 70도쯤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A씨 자리는 여기고요..." 고개를 들자 이상하게도 팀장은 자신이 걸어온 쪽이 아닌 반대쪽, 왼편 끝자리로 나를 안내했다. 팀장이라는 사람은 분명 오른쪽 방향에서 걸어왔는데 내 자리는 왼쪽이라니 약간 의아했다.
일단 안내해 주는 대로 자리에 앉았고 내 자리에는 세팅된 컴퓨터와 다이어리, 볼펜 등 약간의 필수 문구류들 그리고 규정집 한 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제가 지금 하던 일이 있어가지고 이거마저 마무리하고 나서 자세한 얘기 나누도록 하시죠. 일단 규정집 읽으면서 천천히 익히고 계세요."
책상을 훑어보던 사이 팀장은 내 뒤통수에 할 말을 던지고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몇 백 페이지는 족히 되는 규정집을 무겁게 들어 내 앞쪽으로 펼쳐놓던 순간 나를 안내해 주었던 인사팀 남자가 종이 한 장을 펄럭이며 다가왔다.
"인트라넷 계정 만들려면 아이디랑 비밀번호 필요한데, 아이디는 아무거나 하고 싶은 거 하시면 되고요. 보통은 이름 이니셜이랑 숫자조합으로 하거든요? 계정이 생겨야 메일 접속도 하고 공지사항도 읽어볼 수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작성하셔서 저한테 갖다 주세요. 아까 계약서 작성했던 사무실 아시죠?"
"아 네네 바로 작성해서 갖다 드릴게요."
따분하게 규정집이나 보고 있어야 했는데 그 시간을 줄일 수 있는 할 일이 생겨 내심 기뻤다. 아이디를 뭘로 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사실 네 X버, 다X 등 포털사이트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아이디가 기억하기도 쉽고 편하게 쓰기 좋다.
하지만 한국사람으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아니 성인이 되어서도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뭘까 생각해 보면
아마 '튀지 마라. 평범한 게 최고다.' 일 것이다.
인사팀 직원이 대개 사람들은 이름 이니셜과 숫자조합으로 아이디를 만든다고 했으니 나도 암묵적인 룰을 따라야 튀지 않고 묻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숫자는 뭐가 좋을까 하다가 역시 생일만 한 게 없기에 이니셜 세 자리와 생일 세 자리 조합으로 만들었다.
비밀번호는 나중에 바꿔도 되는 것이니 우선 1234로 적었다.
혹시 잠깐 인사팀에 다녀오겠다고 말해야 할까?
쓱 눈치를 보며 주위를 둘러보니 사무실내에는 4명의 사람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했고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서로에게도 또 나에게도 관심이란 건 코빼기도 없어 보였다. 작성한 종이를 들고 조용히 일어나 옆 사무실로 향했다.
민머리가 사내에 더 존재하지 않는 한 그분은 너무나도눈에 띄는 비주얼이라 한 번에 찾을 수 있었다.
자리로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인사팀 남자는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내쪽을 바라봤고 팔을 뻗어서 가져온
종이를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내민 손에 정확히 종이를 전달했고 작성된 내용을 훑어보더니
"역시 A씨도 이렇게 만들었구나?"
라고 말하며 검지손가락 기둥으로 콧등을 쓸어내렸다.
몇 초간 종이를 훑어만 볼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 이제 다 된 건가? 싶어 돌아가려 몸통을 돌리려는데
"아 A씨 잠깐만." 하면서 나를 불러 세웠다.
"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니 책상 밑에서 간이 의자를 하나 꺼내며 앉아보라는 제스처로 의자 위를 두 번 두들겼다.
"아 그게 아까 설명 못한 부분이 있어서 해 주려고 하는데 설마 A씨 벌써부터 바쁜 거 아니죠?" 웃음기를 약간 띈 얼굴로 건들거리면서 물어보는 게 이미 답을 아는 눈치였다.
어색한 듯 웃으며 아니라고 대답하며 의자에 앉았지만 속으로는 말투가 조금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아까 자리에 가니까 규정집이 있던데 A씨는 계약직이라서 규정집 내용과 안 맞는 부분이 많을 거야.
아? 반말하면 혹시 불편해요?"
이미 반말을 하고 물어보는 게 이런 사람들의 고질적 특성인 것 같다. "아뇨,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해야지 뭐 어쩌겠나 안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괜한 구설수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또 앞으로 자주 부딪혀야 할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처음부터 밉보이고 싶진 않았다.
근데 나같이 편하게 대하는 사람 앞으로 많을 거야. A씨가 우리 회사 최연소 사원이거든
그때는 몰랐다.
최연소 사원이라는게 계약직이라는 신분과 만나면 사람을 얼마나 처절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