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푸른꽃으로 피어난 화가의 삶

CONCEPT 손자병법_작은 것의 화려한 반란

by dkb 하우스

> CASE3: 에펠이 하늘 위로 쏘아 올린 파리


[Overview] 존재한다는 것과 디자인 한다는 것은 투쟁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어진 과제에 해답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찾아 변화를 기획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뒤가 꼭 맞아 떨이지지 않는 일도 스스럼없이 행동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파도와 같은 거침없는 숨결과 각도로 세상을 마주해야 합니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과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세워진 에펠타워는 건축가 에펠의 시간과 도전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가 간의 우위를 다투는 만국 박람회에서 에펠타워를 내세운 프랑스가 대역전의 드라마를 쓰게 됩니다. 에펠타워는 에펠 건축회사가 만들면서 불려진 이름입니다. 구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 1832년 ~ 1923년)이 1875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정부가 우정의 선물로 자유의 여신상을 준비할 때 설계와 설치를 담당했으며 이후 파나마 운하 건설에도 참여하게 됩니다. 1886년 프랑스 정부가 파리 만국 박람회를 위해 철의 시대를 예고하는 걸작을 세우기로 하고 설계를 공모하게 되는데 여기서 에펠 건축회사의 공모안이 채택됩니다. 하지만, 에펠의 공모안대로 만들 경우 프랑스 정부가 잡아 놓은 공사비 예산보다 500만 프랑이 더 필요하게 되면서 계획이 무산될 위기를 맞게 됩니다. 여기서 에펠 건축회사는 정부의 부족한 공사비를 우선 부담하고 20년 동안 타워에서 나오는 수입금을 받는 조건으로 협상에 성공하면서 에펠타워 공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과학과 산업의 승리’라는 거대한 기념물로 시작한 에펠타워는 예술도시 파리의 미관을 해친다며 정부에 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탄원서가 빗발치면서 또다시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다행히 25개월만인 1889년 3월 중량 7,000톤 300미터 높이의 세계 최고의 에펠타워가 완공됩니다. 박람회 기간 200만명이 에펠타워의 존재에 감탄했고, 하루 평균 1만 2천명이 에펠타워를 찾으면서 에펠 건축회사가 부담했던 공사비를 1년만에 회수하는 쾌거를 거둡니다. 20년의 설치 기간이 끝나면서 에펠타워는 1909년 다시 철거의 위기에 처하지만, 최신 송신 안테나를 설치하는데 최적의 장소가 되면서 현재까지 파리의 심장으로 살아 고동치고 있습니다. 에펠이 20년 세월을 뛰어넘는 정교함과 잠재적 가치로 에펠타워를 대하면서 파리의 예술성과 자존심을 하늘 위로 쏘아 올릴 수 있었습니다.

2018_09_26_54737_1537923146._large.jpg 존재한다는 것과 디자인 한다는 것은 투쟁과 다르지 않다. 파도와 같은 거침없는 숨결과 각도로 세상을 마주해야 한다.


> CASE4: 요한나 봉어, 푸른 꽃으로 피어난 천재화가의 삶


[Overview] 작은 홀씨가 거대한 군집이 되기 위해서는 무수한 반복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이 그와 같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무수한 노력으로 가능합니다. 한번의 노력으로 화분을 꽃피울 수 있다면, 여러 번 더해져 정원을 꽃으로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매일 씨앗을 뿌리며 산책을 한다면 집주변을 꽃피울 수 있고, 그 범위를 더한다면 산 전체를 꽃피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쓰여진 기록들을 통해 역사 속 인물들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기록이 잘되어 있는 위인이라 하더라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존재하는 만큼 평범하거나 무명의 삶을 역사가 기억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명으로 삶을 마감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년 ~ 1890년)는 생전과 반전된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빈센트는 신학대학 진학에 실패하면서 취미 생활이었던 그림에서 구원의 길을 찾게 됩니다.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고, 작품을 위해 아들로로 옮기면서 수많은 걸작들을 탄생시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광기와 다툼으로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자르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 후 요양차 머물던 오베르에서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37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동료 화가에게 한점의 그림을 판게 유일할 정도로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쓸쓸히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가장 불행하고 힘든 시기에 그려진 ‘가셰 박사의 초상’이 1990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8,250만 달러(약 1,100억원)라는 최고가를 경신하며 작품성과 천재성을 입증하게 됩니다.


동생인 테오 반 고흐(Theo Van Gogh)가 생전의 그를 지켜주었다면, 시골 마을에서 쓸쓸히 사라질 뻔했던 빈센트를 살려낸 데는 요한나 봉어(Johanna Bonger)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빈센트가 죽은 다음해 남편 테오를 잃게 되는 상황에서 요한나는 무명 화가의 그림과 편지를 모두 챙겨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가 화가 빈센트를 세상에 알리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렇게 ‘빈센트 반 고흐_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출간하며 가족과 친구들에게 남긴 800여 통의 편지에 녹아 있던 그의 그림에 대한 고뇌를 소통 시킵니다. 1892년 암스테르담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901년 파리 베른하임 죈 화랑에서의 회고전을 통해 그의 예술성을 인정받게 됩니다. 숨겨지고 잊혀질 뻔했던 작품과 편지들이 요한나의 무한한 노력과 만나면서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라는 거장의 타이틀을 얻게 됩니다. ‘잘 전해달라’는 아이리스의 꽃말처럼 요한나가 빈센트의 푸른 노력과 열정을 꽃 피웠습니다.

5610.jpg 숨겨지고 잊혀질 뻔했던 작품과 편지들이 요한나의 무한한 노력과 만나면서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라는 거장의 타이틀을 꽃피울 수 있었다